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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Jul 12. 2019

빡빡한 여행의 아쉬움

슬로바키아 여행기 -5




 대통령궁에서 브라티슬라바 성까지는 버스로는 8분, 걸어서는 25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미 하루에 수 킬로미터씩 걷는 뚜벅이형 여행가로 이 정도 거리는 거뜬합니다. 다만 간과한 사실은 제가 제 몸집만 한 캐리어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캐리어를 맡겨 둘 곳을 찾지 못해서 브라티슬라바 관광을 함께하는 이 무겁고 유일한 친구 덕분에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난했습니다. 게다가 브라티슬라바는 마치 요새처럼 강변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었습니다. 20분간 땀을 소나기처럼 흥건히 쏟아내고는 성 앞의 상점에서 시원한 사이다를 하나 사서 마셨습니다. 구름 한 점 없어 쏟아지는 태양 아래에 마치 광고처럼 사이다를 마시니 그 어디서 마신 음료수보다 달콤합니다.



 겨우 올라온 성은 백색의 고운 자태를 뽐아냅니다. 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에서 마치 구름 같아 보입니다. 신선이 된 기분으로 천천히 둘러보며 자리를 옮기니 넓은 도나우 강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나옵니다. 유유자적 흘러가는 강물에 파란 하늘이 거울처럼 비칩니다. 저 멀리까지 평야를 타고 지평선이 눈에 선하게 들어옵니다. 폴란드에서도 느꼈던 광활한 지구를 온몸으로 느낍니다. 서울권에서만 자라 한국에서는 평야라고는 눈 씻고도 만나지 못했던 탓에 이런 넓은 평야를 보면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합니다.



 끝이 아닙니다. 이어서 다른 쪽으로는 오밀조밀하게 구시가지가 모여 있습니다. 높은 종탑과 붉은 지붕은 에스토니아 탈린을 떠올립니다. 장난감 마을 같은 구시가지는 건물들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나우 강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머리를 찰랑거리며 장난칩니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를 하루 만에 떠나야 된다니 일정을 잘못 짜도 정말 잘못 짠 것 같습니다. 



 여행가로 도시를 즐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습니다. 저 같은 한 달 내외의 여행을 처음 하는 배낭여행자는 도착지부터 출발지까지 촘촘하게 여행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는 교통, 숙소까지 일정을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거미줄 같은 계획표 아래에서는 마음에 드는 도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일정을 바꾸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보고도 아쉬움만 남기고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특히 저는 출국하는 그리스까지 아직도 2000km가 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너무나도 먼 길을 빠른 시일 내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안타까움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여행기를 보다 보면 수개월 동안 여행하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물론 그분들도 치밀한 계획과 수많은 일정이 있지만, 마음에 드는 도시가 나타나면 며칠 정도는 머무르거나 휴식을 취하고 싶은 도시가 나타나면 며칠 휴양을 해도 여유롭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깊고 알차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이 짧은 일정을 여러 개 이어 붙인 여행자는 도시를 깊이 알지 못하고 수박 겉햝듯이 훑고 지나가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도시를 놓치지 않고 싶어 이렇게 짠 스스로를 탓합니다. 그래도 수십 개의 새로운 도시를 만날 수 있다는 위로로 헝가리로 향할 버스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번 여행이 인생의 마지막 여행은 아니니 다음 장기 여행은 꼭 한 도시를 곱씹을 수 있는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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