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택은 나를 위한 것.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한달 살기
아, 저희는 두브로브니크 한달 살기 하고 있어요.
예능 <꽃보다 누나>로 유명세를 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한 한국인 엄마와 꼬마를 만났다. 이 가족은 푸른 아드리아해가 눈부시게 펼쳐진 아름다운 동유럽의 도시에서 한달 동안 집을 빌려 사는 여행인 “한달 살기”를 하고 있었다. 한달 살기라는 여행이 처음 생기고 새로운 여행 방식으로 자리 잡은 지 꽤 되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여행이라 하면 휴가철에 맞춰 다녀오는 휴가나 2~3주의 기간을 잡고 떠나는 배낭여행을 생각했지만 사회의 변화처럼 여행도 변화하였다. 여행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진화하며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여 발전한 것이다. 한달살기는 변화한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자유 여행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90년대에는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패키지 여행이 유행하였다. 해외라는 미지의 공간을 가기 위해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단체로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여행이었다. 한 두 푼도 아닌 큰 돈을 지불하고 나간 해외 여행은 절약이 몸에 밴 사람들에겐 일종의 타임 어택이었다. 제한된 시간동안 이 여행에 들어간 돈 만큼 말그대로 뽕을 뽑아야 하니 가이드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귀울이고, 모든 거점에서 사진을 찍으며, 맛없는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배가 터지도록 욱여 넣어야 했다. 그래도 생전 처음 한반도를 떠나 낯선 문화에 들어간다는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해 하던 여행자들이다.
점차 여행이 대중화되고, 남들과 다르기를 바랬던 20대들은 배낭여행을 선택했다. 대부분 서유럽을 선택했지만 개중에는 동유럽이나 남미로 떠나는 불타는 청춘들도 있었다. 학교나 TV, 책에서 보고 배웠던 지식과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이런 여행 방식은 20대 뿐만 아니라 30대에서 4~50대로 점차 퍼져 나갔고, 전 세계 한국인이 발을 딛지 못한 나라는 없어졌다. 21세기가 시작되며 인터넷 보급이 급작스럽게 증가하며 이전과 달리 제한될 것이 없으니 전 연령에 걸쳐 세계를 탐험하는 배낭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 두 여행 방식을 구분하자면 90년대 여행은 “관광”이었고, 이후의 여행은 “여행”이었다. 관광은 한자로 觀光이다. 볼 관자에 빛 광, “보기 위해서 떠난다.”라는 목적이 있는 발걸음이다. 그러나 여행은 旅行이다. 목적이 불분명하다. 여행의 목적은 단지 떠나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관광에서 여행으로 여행의 방식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가이드의 목소리를 떠나 자유롭게 목적없이 여행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거대한 줄기 같은 일정은 유지가 되어도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내 스스로 결정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런 선택의 즐거움 때문에 여행을 하게 된다.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드물다. 모든 선택은 내 손으로 한다는 자유사회에 살고 있다는 세뇌 아닌 세뇌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선택권이 있는듯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손에 꼽힌다. 가장 먼저, 대학 입학이나 취업을 할 때는 우리가 대학과 기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과 기업이 우리를 선택한다. 우리가 하는 선택이라고는 원서를 집어 넣을까 말까 하는 것이다. 점심을 먹을 때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기 보다는 주변 동료나 친구의 눈치를 보고 선택을 제한한다. 이외에도 수 많은 선택들이 반 강제로 강요되어 있다. 물론 이런 말들은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어찌되었던 여행에서 만큼은 이런 고민없이 내가 하는 선택의 모든 길이 나로 인해 일어난다는 즐거움이 생긴다.
2010년대 들어와서 가장 주목받는 여행 방식은 바로 “한달 살기”이다. 여행이 주는 선택의 즐거움을 넘어 거주의 환경 선택부터 스스로 하게 되는 이 여행방식은 2017년을 기점으로 폭발하듯이 늘어났다. 2017년 가장 뜨거웠던 키워드인 욜로(YOLO)와 가장 영향력 있던 예능 <효리네 민박>의 결합은 이러한 한달살기라는 새로운 여행 방식을 시작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오늘 무엇을 할지는 아침을 먹으며 결정하고, 하고 싶은 일은 해보지만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노동이 사라진 유토피아적 휴가는 삶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달 살기를 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서울에서 만날 수 없는 생기가 생겼다. 진정으로 선택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 살기를 하고 있던 아이 엄마에게 이런 여행 방식의 단점이 있냐고 물어 보았다.
“우리는 힘든게 없죠. 살면서 이렇게 일 안해본 날이 긴 건 처음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보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더 걱정해요. 이렇게 떠나면 돈은 어쩌고 앞으로 일은 어쩌고 하면서. 호호.”
한달 살기를 하며 힘들고 아쉬운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의 유일한 걱정은 한국의 지인들이 자신들을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 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수 많은 선택으로 둘러 쌓여 있고, 이 가족은 자신들을 둘러 싸고 있는 선택이 아닌 이 선택의 틀을 깨 버리는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도, 당신도 이 가족의 선택이 대책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행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면, 한달 살기는 아직 여유로운 삶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우리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혹은 이런 여유로운 삶을 살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을 염려하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애가 여기 와서 ‘엄마, 나 여기와서 너무 행복해.’ 라고 한 마디 했는데, 그 한 마디가 여태 살아오면서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어요.”
아이의 엄마의 웃음은 바람을 타고 성벽 위를 뛰어 노는 아이에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