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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Apr 07. 2020

여행은 훈장이 아니다

깃발 꽂듯 힘들게 여행하는 우리의 삶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중앙에는 백색의 성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구름처럼 서 있다. 뾰족하고 높은 고딕 양식의 독일 성들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흰색에 아담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성 앞에는 푸른 하늘만큼 파란 도나우 강이 한눈에 보이는 드넓은 전망대가 있다. 회색 빛의 두꺼운 돌벽이 하나씩 쌓여 만들어진 전망대에 앉아 내리쬐는 따듯한 햇빛에 노곤한 기운이 돈다. 유유자적 흘러가는 강물에는 거울처럼 구름이 비쳐 함께 흘러간다. 저 멀리까지 평야를 타고 지평선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서울에서는 만나기 힘든 넓은 평야를 보니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하다. 강이 흐르는 반대쪽으로는 오밀조밀하게 구시가지가 모여 있다. 높은 종탑과 붉은 지붕은 에스토니아 탈린을 떠올리게 한다. 장난감 마을 같은 구시가지는 빼곡한 건물들로 틈이 보이지 않는다. 도나우 강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머리를 찰랑거리며 장난을 친다. 일정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하루 만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여행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중 내가 했던 대부분의 여행은 깃발 꽂기였다. 2~3일에 한 번씩 이동하며 최대한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여행이다. 마치 부루마블처럼 도시를 가면 이 도시에 들렸다는 흔적만 빠르게 남기고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그러다 보니 한 도시나 나라에 대해 깊게 파고들면서 여행에 녹아들지 않고, 빨리 그리고 더 많이 돌아다니며 발자국을 많이 남기는 것만 것 목적이었다. 그래서 이처럼 아름다운 작은 보석 같은 도시를 만나고도 금세 떠나야 했다.


 문자 그대로 수박 겉핥는 듯한 여행이 되어 버렸다.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보이는 견문이 넓어진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체력은 체력대로 소모되고 체류 시간보다 이동 시간이 긴 여행 탓에 무언가 배우거나 쉰다는 기분은 없었다. 비슷한 도시에서 비슷한 무언가 보고 또다시 이동을 반복하니 그 문화에 대한 이해는 전혀 되지 않았다.

 

이왕 큰돈과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온 여행이니 더 많이 돌아다니고 싶은 욕심 때문인가. 하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욕심보다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이런 여행만이 마치 게임에서 퀘스트를 깨는 듯 눈에 띄는 성과를 주는 기분이었다. 여권에 도장이 찍힐수록, 사진첩 속 분류가 많아질수록 많은 나라를 다녀왔다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성과가 되었다.


 인생에서 성장하는 것에는 보상이 거의 없었다. 수능을 치르고 받은 입학의 기쁨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했고, 공모전이나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탄 적도 없었다. 취업의 기적은 회사를 나가는 날부터 행복이 빨리는 기분이고, 통장에 찍히는 잔액은 보상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가시적인 성과는 존재할 수 없었다. 살아가며 눈에 보이는 성과와 보상이 있었다면 도파민이 분출되어 의욕이 생겨 자존감을 채워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에서 이런 일들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보상이 없는 나날들은 감정의 정체를 불러왔다. 그러니 여권에 찍히는 도장만이 유일한 훈장이 되어 매일같이 움직이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똑같아 보인다. 어제도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 어제 하다 못한 일을 오늘 하고, 오늘 하다 못한 일을 내일 할 것이다. 그래서 보상을 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게임을 하듯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행의 끝은 대개 정해져 있다. 허무함이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했는지 가만 생각해보면, 결국 사진으로 밖에 남지 않는 추억들이다. 사진을 보지 않고 무엇을 했나 상상해봐도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성당, 똑같은 동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성과를 위한 여행이 아닌 진득하니 붙어있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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