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May 25. 2020

조급함으로 가득한 나의 여행

여행은 짧아도 인생은 길다

 러시아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발에 땀이 나도록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언제나 가고 싶은 나라였기 때문에 한시라도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을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붉은 광장의 휘황찬란한 야경부터 게임 테트리스에 나오는 바실리 성당, 그리고 푸틴이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크렘린 궁전까지. 도착한 당일부터 시작된 혼자만의 투어는 끝없는 걷기만으로 이루어졌다. 높이 솟아 붉은 광장의 정문 역할을 해 주는 부활의 문이나 성스러운 카잔 대성당, 사회주의의 모태가 된 레닌의 묘와 같은 굵직한 관광 명소부터 가이드북 구석에만 작게 표시된 사소한 성당과 박물관까지 돌아다니니 하루 20km씩 걷는 일은 예사였다. 


 짧은 시간이라는 조급함 때문에 최대한 많이 돌아다닐 수 있는 동선을 한국에서부터 짜서 왔다.  여기까지 온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게, 말 그대로 뽕이라도 뽑자는 심정으로 돌아다녔다. 여행을 벼락치기한 것이다. 학창 시절 벼락치기하면 시험 성적은 어느 정도 나왔더라도 후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여행도 벼락치기를 하니 다녀간 곳은 많아도 후에 기억나는 것은 사진으로 남은 것뿐이었다. 모스크바의 바람, 도시의 냄새, 어디선가 흘러오는 작은 소리 등 사소한 것들은 전혀 머리에 남지 않았다. 나는 관광으로 도시를 공부한 것이지 여행을 하지는 못한 것이다. 


 여행을 길게 왔으면 이 도시를 조금 더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당연하게도 여행 기간을 늘리면 되는 일이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여행이 아쉬우면 더 머무르면 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사흘 만에 도시를 돌아보는 일정이 아니라 이 주, 삼 주, 혹은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도시를 둘러봤으면 이런 아쉬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기 전 조금 더 길게 간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여행을 떠나면 뒤쳐진다는 조급함이 마음속 깊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들어오던 소리 때문이었다. “네가 잠을 자며 꿈을 꾸는 동안, 나는 꿈을 이루고 있다.” 라던가, “오늘 하루 쉬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라는 명언들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때문에 여행을 간다는 것은 휴식이나 새로운 삶과의 만남이라는 생각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다는 생각이 더욱 컸다. 그러니 다음 일자리나 공부에 대한 걱정과 부담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여행 전부터 떠오른 이런 생각들은 결국 애매한 기간의 여행을 계획하게 하였고, 도시 별로 짧은 시간만 훑고 지나가야 했다.


 뒤쳐지면 안 된다는 조급함은 여행뿐만 아니라 언제나 튀어나왔다. 그리고 조급함은 오히려 쉽게 포기하는 삶을 만들었다. 되지 않는 길은 빠르게 포기해 다른 길을 찾았다.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을 때 한 두 번 떨어진 영화제에 곧바로 나는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소설가를 꿈꿀 때는 한두 번 떨어진 공모전에 나보다 재능 있는 사람이 많으니 안 되는 길은 안 되는 길이라 판단하고 포기했다. 나보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그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뒤쳐진다 여기면 더 노력해서 시간 낭비할 바에 포기하고 말았다.


 어찌 생각하면 안 되는 길은 쉽게 포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뒤돌아 보면 남는 것은 패배주의에 빠진 내 모습뿐이었다. 조급함으로 인해 이리저리 지름길을 찾아 헤매는 사이 결국 나는 여행도 즐기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재능 있는 사람의 노력마저 재능 탓을 하며 깎아내렸다. 그리고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편한 길로 발을 돌렸다. 결국 과녁이 사라진 방향 잃은 화살은 남을 겨누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무엇이었나 기억도 나지 않게 되었다.


 데프콘의 노래 중 <아프지 마 청춘>이라는 노래가 있다. 한때 유행한 <아프지만 청춘이다>라는 책을 비꼬고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담은 노래였다. 예능에 나와서 웃기고 재밌는 모습만 보여준 20년 차 가수가 진정성을 담아 부른 이 노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조언해준다.

 

“그래 여기 서울 삶은 절대 쉽지 않았지. 난 아직도 내가 이방인인 것 같아 미워. 내 청춘의 상징 몸에 밴 라면 냄새, 곰팡이 걷어내고 먹던 밥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긴 해. 이런 걸 고생이라 말하고 싶지만 이내 난 잘 될 거라 나를 위로하지 않았고, 더 잘 되려고 노력했어 그게 맞아 더.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쉽지. 청춘이 아프면 그다음은 어디일지. 위로가 안 되는 그 말은 하지 마요. 빛나야 할 때가 지금이니까요.”


 어렵고 힘든 길을 걷는 청춘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한 길을 꾸준히 파서 결국 성공한 40대 래퍼의 성장 이야기다. 물론 성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 당시는 힘들었어도 결국 성공한 다음 이런 노래를 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으로 보일 수 있다. 곰팡이 핀 밥을 먹거나, 하루에 라면 하나로 겨우 버티고 비 새는 집에서 살았지만, 결국 재능이 있고 성공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조급함 없이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무명의 생활을 10여 년 넘게 이어 왔고, 자신의 음악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과거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청춘을 위해 이런 노래를 불러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삶은 길다.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조바심이 났던 것은 결국 삶을 길게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1년 안에, 2년 안에 성공하고 싶다는 거창한 목표를 바라보고 나보다 빨리 가는 듯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포기했던 것이다. 인생이 하나의 긴 동아줄이라고 하면, 나는 인생을 동아줄 안에 있는 한 줄기의 동아 위에 있다가 쉽게 다른 동아로 갈아타며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쉽지만 인생은 길어도 이미 계획한 여행은 짧았다. 또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음 여행은 언제일지 몰라도 천천히 걸어가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데프콘의 거친 목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이전 04화 아폴로를 담배처럼 피우며 어른이 되고 싶던 아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