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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Sep 14. 2020

오늘 난 뭐했나 라는 생각이 들때

목표 의식 없는 하루보다 주인공이 되는 하루

 노는 건 언제나 좋다. 누구를 만나서 노는 것도 좋고, 영화 관람 같은 취미 생활을 하며 노는 것도 좋다. 그중 가장 즐겁지만 슬프고, 재밌지만 무거운 놀이는 할 일을 미루고 노는 일이다. 해야 하는 일이 코 앞으로 다가올수록 마음의 압박은 커지지만, 반대급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 노는 일에 대한 집착은 커진다. 새하얀 한글 창을 띄워 놓고 한 글자도 쓰지 않은 채 인터넷을 하염없이 돌아다니고, 궁금하지도 않은 정보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그러다가 유튜브에 접속하게 되면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영상들을 따라가게 된다. 하나를 보고 나면 “아, 재밌었다.”라는 생각을 하기보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영상을 누르고, 또 다른 영상을 누르다 보면 어느새 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결국 하겠다는 일은 하지도 않고 백지만 덩그러니 남은 상태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이쯤 되면 노는 것도 질리게 된다.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다. 동영상을 보고 싶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이 흥미롭지도 않다. 단지 일을 하기 싫어 빈둥댔다. 할 일이 있고, 해야만 하고, 더 이상 노는 게 지겹지만 또다시 꾸역꾸역 다른 자극적인 재미를 찾아 휴대폰을 켜게 된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게 되면 차가운 밤의 어둠이 가로등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뇌가 끈적한 기분이다. 필요 없는 정보, 자극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지만,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하루 종일 놀았다. '놀다'라는 말에는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라는 뜻과 '일정히 하는 일이 없이 지내다.'라는 뜻이 공존하는데 오늘이 바로 일정히 하는 일 없이 지낸 날이다. 술 마시고 놀지도 않았고, 게임하면서 놀지도 않았다. 누구를 만나서 논 것도 아니었고, 놀러 나가지도 않았다. '놀았지만' '놀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는' 놀이들은 목적이 있다. 말 그대로 즐거워지고 싶다는 목적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재미를 위해, 게임이나 운동으로 인한 승패 경쟁의 재미를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한 놀이였다. 목적이 있으면 매일 놀아도 좋다. 하지만 오늘 놀았다는 것은 목적 없는 회피일 뿐이었다. 재미를 찾기 위해 놀았던 것이 아니니 억지로 노는 기분이 물씬 들었다. 그리고 방향 없는 놀이는 회피를 위한 변명거리일 뿐이다. 눈 앞의 일을 피하기만 하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는 않으면서도 하기 싫다, 놀고 싶다 라는 말을 입에 단 하루가 되었다.


 오늘 하루만 그런 것도 아니다. 거진 몇 달을, 더 생각해보면 사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한 듯하다. 그럼 왜 목적도 없는 회피로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빈둥대기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주인공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술 마시고 게임하며 놀았던 걸 보면, 그 안에서는 내가 주인공이었다. 물론 술자리의 왕이라 모든 술자리를 주도한 건 아니었고, 게임의 왕이라 모든 게임을 이겼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즐겁게 놀았던 일들은 모두 내가 원했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이 시켜서, 혹은 사회의 압박으로 술자리에 나가고 게임을 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재미를 위해 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 마음속 이 놀이의 주인공은 나였다.


 하지만 그에 반에 일과 공부에서 나는 주변인이었다. 웃긴 일이다. 주어진 일을 하는 건 나고,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고, 억지로 해야 되는 것이다 보니 나를 위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미루게 되었다. 어찌 보면 목표의식이 얕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를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공부를 잘해야지, 일을 끝내야지 하는 추상적인 목표를 세웠다. 당장 일 잘하는 사람이나 공부 잘하던 사람을 보면 목표 의식이 명확하니 주체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성장해야 한다거나, 3년 이내 합격하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잡는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목표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라는 말은 쉽다. 누군가의 성공담에 관한 강연을 보면 언제나 나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세요, 무엇을 어떻게 하세요. 결론은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세요. 대체 그 목표의식은 어떻게 생겼길래 가지라고 하는 것일까. 마치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연애 감정으로 접근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해 본 적도 없고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는 데 따라 하라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 목표를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여행이다. 이상하게 여행은 술자리나 게임과 같이 노는 일인데도 그다지 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놀았다는 것과 여행은 경제적으로 보면 모두 소비다. 일을 하며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과는 정 반대에 위치한다. 여행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극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여행은 거진 수 십에서 수백만 원을 쏟아붓는 소비 활동이다. 돈이라는 큰 희생을 감수했고, 돈을 쓰지 않는 다른 기회비용을 버리면서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큰돈과 시간을 써서 그런지 확실한 목표 의식이 선다. 목표가 서게 되면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진다. 베트남 여행에서는 친구들과 바다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저녁에는 시원한 테라스에서 맥주 한 잔 하는 목표가 있었고, 인도 여행에서는 처참하다는 인도의 위생과 치안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프랑스 여행에서는 단순히 에펠탑이 얼마나 웅장한지 느끼고 싶었다. 이렇듯이 이번 여행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를 갈 것인지는 여행의 주체인 내가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선택의 책임을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결국 단순한 놀이와 다를 바 없던 여행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회색 도시에서 수많은 엑스트라들이라 느껴지던 내가 여행의 선택으로 주인공이 된 것이다. 목표 의식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이해시켜주는 것은 비단 여행뿐만이 아니다. 여행이 너에게 목표가 무엇인지 알려주니 여행 가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는 않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여행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있다. 단적인 예시를 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생각하자는 것이다.


 지금 내가 잡은 목표라는 것은 정말 하루에 한 번 씩 바뀌는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처럼 단순하고 거창하기만 했다. 그냥 돈 많이 벌고 싶으니 일을 해야지. 시험이 코 앞이니 공부해야지.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시험이 코 앞인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여행 갈 때만큼이라도 조금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더라면 이런 오늘 난 뭐했나 같은 생각 하며 회피하기만 하는 하루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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