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May 03. 2020

여행에서 일기란

일상에서의 느끼지 못하는 다양한 감각을 기록한다


 크로아티아는 다른 도시들이 너무 빼어나서 수도인 자그레브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면이 있다. 요정의 숲이라고 불리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과 라스토케는 우리가 살면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천연색보다 더 짙푸른 숲과 호수가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다르는 영화계의 거장 히치콕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라고 한 덕분에 많은 연인들이 황홀한 석양을 배경으로 사랑을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스플리트라는 도시는 어떤가. 로마의 황제가 은퇴 후 말년을 즐기기 위해 빛나는 아드리아해가 보이는 해변에 지은 궁전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두브로브니크는 <꽃보다 누나>라는 말 하나로 요약된다. 이처럼 다른 도시들에 비해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는 움츠러든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이런 자그레브가 가지고 있는 매력 중 하나는 광장 옆 카페이다. 자그레브의 중심지인 반 옐라치치 광장은 피렌체나 파리, 베를린의 광장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작은 만큼 모든 찰나의 순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따듯한 햇살이 들어오는 광장에서 가족들이 뛰어놀고 연인들이 손 잡고 걷는 모든 순간들이 한 폭의 유화 같다. 넓지 않은 탓에 이런 풍경들을 한 순간에 낚아챌 수 있다. 다른 도시의 광장들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리는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로코코 미술 같다면 자그레브의 광장은 낭만주의의 미술처럼 이 광장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광장 옆의 노천카페에 앉아 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를 방문할 이유가 충분하다.


 카페에 앉아 잠시 이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작고 하얀 에스프레소 잔에 커피가 나온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펜을 들어 지금의 모든 감정을 적어 내려간다. 여행을 할 때면 항상 광장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일기를 쓴다. 한국에서는 전혀 쓰지 않던 일기를 여행만 오면 마치 손이 뇌가 된 듯이 저절로 써진다. 지금 마시는 커피의 씁쓸하고 고소한 맛, 옆 테이블의 케이크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설탕 향기, 그리고 맑은 하늘의 빛과 에너지, 재잘거리는 새의 지저귐과 종이의 감촉까지 모두 잉크가 되어 두꺼운 종이에 새겨진다.


 한국에서 수년을 살아도 한 줄 일기를 쓰지 못하지만 여행을 오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새로운 오감 때문에 펜을 들게 된다. 쳇바퀴처럼 매일마다 똑같이 돌아가는 작은 세상에 갇혀 있다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여행을 하면 이 모든 경험과 신선한 자극을 놓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워진다. 때문에 강박적으로 모든 순간을 기록한다. 여행을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 다른 태양이 뜨고 진다. 서울에서의 하루도 자세히 곱씹어보면 그 하루의 새로움이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서울에서 집중해야 태어나는 하루의 새로움보다 더욱 강렬한 감각이 살아있다.


 아마 일상에서 우리는 하루의 소중함이나 새로움을 경험하기에 부족한 시간과 행동반경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서면 매일 같은 카페를 들려 같은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직장이나 학교로 간다. 그리고 타의적인 지루한 아침이 지나가고 점심을 먹어야 한다. 다시 지루한 식곤증을 버티면 저녁이 되고 집으로 지친 몸을 잡아끌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몸은 내일 똑같은 하루를 버티기 위해 잠에 들어야 한다. 이런 하루를 반복하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느끼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루하지만 안정된 무엇인가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매일 같은 카페 대신 다른 카페에서 새로움을 느끼려면 안정적이었던 내 출근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혹은 잠을 줄여야 할 수도 있다. 일상에서의 이런 권태를 없애고 싶어 점심시간을 쪼개 멀지만 맛집을 찾고 싶어도 점심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여행은 이런 일상들이 가지는 안타까운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을 모조리 없애 준다. 그리고 여행으로 넘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다양한 감각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카페에서 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을 알리는 위장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카페에서 나와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이 레스토랑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크로아티아 언어로 된 간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타이거 새우가 들어간 올리브 파스타와 콜라를 한 잔 주문하고 가만히 앉아 이 도시의 소음을 들어 보았다. 북적이는 듯하지만 바쁘지 않고, 5분마다 들리는 트램 소리가 잔잔하게 다가오는 이 도시가 움직이는 소리를 또다시 기록한다. 이어서 먹기 아까울 정도로 멋진 파스타가 한 상 차려졌다. 큼지막한 타이거 새우를 머리부터 꼭꼭 씹어 먹어 꼬리까지 입 안에서 사라진다. 오일 파스타 특유의 올리브 향과 새우 기름의 바다 내음이 콧 속을 헤집고 다닌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걸어 본다. 그전에 아직 햇빛이 너무 뜨거우니 새콤한 사과 스무디 하나를 길거리에서 샀다. 얼음과 함께 사과가 갈리는 소리가 신나게 울려 퍼진다. 스무디를 쪽 쪽 거리며 빨아 마시면서 골목을 거닐며 다니니 처음 걸었을 때와 다르게 골목마다 새로운 정취가 느껴진다. 사과 향이 코 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이 골목들은 사과 향과 함께 기억된다.


 스무디와 함께 시내가 잘 보이는 작은 벤치에 앉아 일기를 또다시 펼쳤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멋진 그림으로 자신이 느낀 모든 감정과 감각을 기록할 것이고,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느낌을 아름다운 선율로 기록할 것이다. 어떤 재능도 가지지 못한 안타까운 나에게 이 아름다움을 시간이 지나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사진과 일기뿐이다. 오늘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마치 강박증처럼 이 모든 순간을 놓치기 싫어 펜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힘들게 하루를 버티고 있을 때, 이 페이지를 펼쳐보면 다시 흘러나오는 이 곳에서 모든 감정을 하나라도 놓치기 싫기 때문일까. 서투른 솜씨의 글이라도 나름 노력하여 이 추억이 증발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둔다.


이전 13화 저는 이 나라에서 50년을 살아도 이방인이에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