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Mar 21. 2020

잃어버린 생일을 찾아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생일에 다시 의미를 찾다. 

 내 생일은 4월 중순이다. 벚꽃이 지고 여름이 찾아오는 애매한 날이고 3월 2일로부터는 정확히 6주가 되기 전날이다. 정확히는 대학교 1학기 중간고사 바로 직전 날이다. SNS의 발전으로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에 들어가면 나오는 [OOO님의 생일입니다!] 라는 문구를 보고 “생일 축하해~! 시험 잘보고 시험 끝나면 술이나 마시자”라는 메시지는 끊임없이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이라고 특별하게 챙기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끓여 주신 미역국을 먹고, 학교나 도서관에 가서 밤 12시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기만 했다.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이후 생일을 다시 기억해서 축하해 줄 애인도 없었으니 그냥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 지난 수년간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점차 사회 생활에 발을 디디어 가다 보니 생일은 자각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맞은 25번째 생일도 나에겐 별다를 것이 없었다. 생일이라는 특별한 이벤트보다는 전날 도착한 탈린의 구시가지에서 맞은 아침이 더 특별했다. 수 백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탈린의 구시가지는 어린시절 읽던 동화책 그 모습 그대로이다. 돌로 되어 울퉁불퉁한 바닥은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나는 듯한 환청을 느끼게 해준다. 민트색, 노란색, 아이보리색 등 다양한 건물들은 자신들만의 특색을 뽐내고 있지만 서로 어우러지는 하모니를 가지고 있어 지루하지 않다. 골목마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따라 걸어가면 이 파스텔 톤의 유화 같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구시가지의 통일성은 지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색색의 건물들은 저마다 다른 색으로 보이지만 높이서 바라보면 모두 붉은 지붕을 쓰고 있어 마치 미니어처 장난감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도시를 보면 웅장하거나 신기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탈린의 구시가지는 마치 작은 강아지를 보는 귀여운 기분이다.


날씨도 이 아름다운 도시를 빛나게 해준다. 푸르다 못해 부서질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을 가진 탈린은 어디를 가도 바삭거리는 볕이 들었다. 여유롭게 햇빛을 따라 걸어 다니다 보면 구시가지 한 가운데 있는 넓은 광장에 도착한다. 광장에는 수 백 년이 된 고풍스러운 시청이 떡하니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넓게 레스토랑들이 시청을 바라보며 즐비하다. 전통 복장을 입고 에스토니아 음식을 서빙하는 종업원들은 낯선 여행자들에게 음식 냄새를 풍기며 넌지시 유혹한다. 날씨도 완벽하고 음식 냄새도 완벽하니 못이기는 척 레스토랑 앞에 있는 테라스에 앉아 맥주와 달짝지근한 에스토니아식 콩요리를 주문했다.

알코올이 몸에 잘 받지 않아 한국에서도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따사로운 햇빛에 고풍스러운 도시의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기회를 놓치는 듯하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높은 시청을 바라보며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거품부터 쭉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탄산의 따가운 느낌에 숨을 크게 내쉬자 상쾌함이 온 몸을 간지럽힌다. 


다시 한 번 두 눈을 감고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니 머리가 띵하다. 눈을 뜨니 광장 사이의 골목에서 색색의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이 손을 잡고 뛰어 온다. 쏟아지듯 나오는 아이들은 중세 시대에 어울릴 복장을 입고 끊임없이 걸어와 광장을 가득 채운다. 8~9살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거의 중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아이들까지 모두 광장을 가득 메우고는 둥글게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강강수월래처럼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나도 모르게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이벤트 같았다.


공연을 보며 생각해 보니 내가 저 아이들처럼 학생일때는 생일을 뭔가 특별한 날처럼 챙겼다. 학창 시절에는 누구의 생일이 되던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돈을 모아 케이크를 준비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숨겨둔 케이크를 꺼내 축하해줬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의식처럼 생일 케익을 서로의 얼굴에 묻히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다 같이 생일을 챙겨주니 그날만은 뭔가 특별한 내가 된 기분이었다. 생일 전날부터 기대되고 어떤 하루가 일어날까 궁금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면서 머리숱과 함께 잃어가는 것 중 하나가 생일이었다. 어른이 되면 특별해 질 줄 알았지만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매일 똑같이 학교-집 혹은 일-집을 반복했다. 반복되는 삶에서 특별함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생일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생일이라고 유난 떠는 것보다 당장 코앞의 시험이나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막상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도 무언가 해야 했기 때문에 생일 같은 사소한 일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니 큰 기대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생각해보면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고 해도, 내심 누구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가 오는지 궁금한 채 아침에 눈을 뜨곤 했다. 1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친구가 생일 축하한다고 갑자기 연락이 오는 것도 좋았다. 365일 중 똑 같은 하루라고 생각을 하더라도 나도 내심 마음 속에서는 생일에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이 추억과 함께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평범하지 않는 단 하루이기 때문이다. 지루한 쳇바퀴같은 삶을 살아도, 남들과 똑 같은 삶을 살아도, 생일은 365일이라는 긴 1년 중 단 하루 나에게만 특별한 날이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하루라도 나에게는 나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언제나 남의 생일에 생일을 축하한다고 한 적은 있어도 내 생일에 나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한 적이 있었나 싶다. 남의 생일에는 남을 축하하고, 내 생일에는 남의 축하를 기다린다. 정작 1년을 살아오면서 고생한 스스로에 대한 생일 축하는 하지 않았다.


강강수월래를 끝낸 아이들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왔던 골목으로 사라졌다. 맥주는 뜨거운 햇빛에 벌써 미지근 해졌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고생한 나를 축하하기 위해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공연을 보느라 미지근해진 맥주와 다르게 다시 한 번 시원한 맥주가 입 안에서 터졌다. 작년부터 올해를 돌이켜보니 힘든 날도 있었고 재밌던 일들도 있었다. 지난 몇 년이 힘들다고 여행으로 도망친 스스로가 위축되었던 날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생일이니 위축 보다는 도망칠 수 있던 용기를 축하했다. 함께 잔을 부딪쳐 줄 사람이 없더라도 혼자 잔을 높게 들어 태양과 건배를 나누고 입으로 시원한 맥주를 가져갔다.

이전 14화 여행에서 일기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