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희성 Sep 25. 2020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여행을 떠나는 단순한 이유, 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떴다. 햇빛이 벌써 따듯하게 내 얼굴을 감싸고 있다. 평소에 알람 소리로 듣고 눈을 뜨면 피곤한 눈꺼풀은 대체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양빛으로 잠에서 깨니 침대에서 눈을 세 번 깜박거리기만 해도 잠이 달아났다. 베개를 쥐고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던 지난 날들과 달리 눈을 뜨고 곧바로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다. 일회용 커피 스틱을 털어 커피 한 잔을 만들고 테라스로 나간다.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 느적느적 작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바쁜 일상을 사는 바깥 풍경과 다르게 하염없이 여유로운 내 모습이 믿겨지지 않는다.


 아직 따듯한 커피잔을 아무데나 올려 두고 대충 씻는다. 눈곱만 뗄 만큼 대충 씻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간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수 많은 우리가 타고 있다.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이유로 작은 공간을 공유한다. 2층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우르르 내린 우리는 이제는 각기 다른 테이블로 가서 떨어진다. 하지만 다시 모이기에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상들 앞에 일렬로 선 우리는 다시 같은 목적을 향해 컨베이어 벨트 위 물건들처럼 조금씩 움직인다.


 오늘 조식은 쌀국수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지론 때문에 머리를 말리며 한 두 입 씩 집어넣던 식사와는 다르다. 거의 저녁식사에 버금갈 정도로 접시 가득 음식을 담는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햄, 쫀득함이 살아있어 서로 떨어지지 않는 만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집는 순간 바삭함이 느껴지는 빵,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쌀국수까지. 탄수화물에 단백질, 지방의 균형은 무너졌지만 손이 절로 가는 아침 밥상은 오랜만이다.


 아침은 황제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야 건강하다고들 하는데, 황제 같은 식사가 바로 여기 있었다. 식당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저마다 만족하는 표정을 지니고 하나 둘 씩 사라졌다. 나도 자연스레 식당에서 나와 방으로 올라간다. 방에 들어와서는 다시 침대에 엎어져 베개를 품에 안고 가이드북을 열어 본다. 오늘 뭐하지. 계획이 없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다. 한참을 그러고 누워 있지만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다.


 서서히 잠들려는 찰나에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대충 옷만 걸치고 호텔 밖으로 나서니 아침에 나를 깨워준 햇빛과 함께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겨온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바다가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식당 앞 웨이터처럼 우리를 바다로 이끌고 간다. 자연스럽게 백사장에 있는 작은 파라솔 아래의 비치의자에 누워 있으면 종업원이 음료나 맥주가 적힌 메뉴판을 들고 온다. 자리 대여에 비용은 없다. 음료수나 맥주만 주문한다면 몇 시간이든 머무를 수 있다.


 술을 잘 하지 못해 낮술은 위험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하늘을 닮은 바다는 푸르게 철썩이는 날씨 아래에서 맥주를 거절할 수는 없다. 가져다 준 맥주에는 냉기가 살아있다. 캔뚜껑을 따니 청량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의 따가운 탄산이 아파서인지 눈에는 찔끔 눈물이 나온다. 한 모금 마신 맥주는 모래 위에 살짝 박아두고 휴대폰으로는 음악을 골라본다. 댄스 음악을 듣자니 이런 잔잔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고, 발라드를 듣자니 이건 또 너무 잔잔하다. 잔잔한 파도지만 떨어지는 뙤약볕을 피하는 그늘 아래에서 어울리는 건 역시나 포크 송이다. 음악이 시작되고 나서 챙겨온 책을 읽는다. 가벼운 책이라 어느 부분을 펼치더라도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읽다 보면 알딸딸한 기운이 얼굴을 달아 오르게 한다. 노래와 파도 소리와 저 멀리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소리가 섞여서 들릴 때 즈음 눈이 서서히 감긴다. 읽던 책을 그대로 접어두고 낮잠에 빠진다.


 한 시간은 잔 듯 하지만 시간은 30분 정도 지났다. 비치의자 위에서 기지개를 크게 펼치고는 이제 시장으로 향한다. 갖가지 구경거리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길거리 음식들이다. 반미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쥐고 다시 시장을 구경한다. 부드러운 빵 덕분인지, 볼거리가 많아서인지, 큰 바게트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손에 묻은 소스를 빨아 먹다 보니 앞에 있는 과일들이 먹음직스럽다. 따듯한 날씨 덕분에 갖가지 과일 향이 섞여 달콤한 향수처럼 온 거리를 휘감고 있다. 과일 하나 사려면 손이 덜덜 떨리는 비싼 한국과는 달리 과일이 킬로그램당 천원 꼴이다. 심지어 현지 직송이라 신선도도 한국보다 낫다. 망고 몇 개를 사고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무심하게 칼로 슥슥 자른 망고는 새콤한 맛 보다는 달콤함이 압도한다. 너무 잘 익어 망고 특유의 향이 터져 나온다. 한국에서 망고를 먹는다면 망고 가운데 있는 심지에 붙은 과육이 아까워 갈비를 뜯듯 어렵게 먹지만, 현지 망고는 대충 먹고 버려도 먹을 게 많다.


 길거리 음식들로 충분히 배를 채웠으니 이젠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앉아서 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려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고, 혹은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하거나 카톡을 해도 좋다. 노는 데는 이유가 없다. 카페인을 충분히 섭취했으니 힘을 얻어 아무 거리나 거느닐 시간이다. 느적거리며 골목마다 사진을 찍고 다니니 벌써 5시다. 호텔로 돌아가 시원하게 땀을 씻어내고 저녁 식사를 위해 출동한다. 오늘 저녁은 로컬 음식집. 어제는 호텔에서 멋진 저녁을 보냈으니 오늘은 현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저녁을 즐긴다. 고기가 맛있기로 유명한 바비큐 맛집이다. 맥주 세 캔과 숯불고기, 닭날개구이를 주문하고 먹는다. 감칠맛나는 소스에 버무려진 고기를 뜨거운 숯불에 그대로 구워 달콤한 불냄새가 난다. 오늘 하루의 끝을 장식하기 좋은 음식이다. 박하와 오이를 고기에 싸서 먹으면 그 달콤함이 배가 된다. 맥주와 고기로만 배를 채우니 콧노래가 나온다. 노래방이 주변에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노래방은 없는 대신 해변은 가깝다. 알딸딸하게 취한 기분을 즐기며 길게 펼쳐진 해변을 따라 걸으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도 파도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않는다. 길게 펼쳐진 해변을 따라서는 칵테일 바가 들어섰다. 해변을 걷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 달달해 보이는 술을 하나 주문한다. 이 술까지 마시면 정말 취해버릴 것 같다. 색깔이 예쁜 술을 눈으로만 즐긴다. 마치 어떤 노래처럼 색깔이 예쁜 술을 눈으로만 즐긴다. ‘그래 그걸로 줘, cause it`s red. 그냥 색깔이 마음에 들어 골랐어.’


 쓸데 없는 말을 하며 취함을 즐기다가 호텔로 돌아간다. 그리고 취기가 남아 있는 채로 침대에 엎어져 잠에 빠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많은 일을 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자고 싶으면 자고. 원초적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하루를 보내니 머리 속에 걱정이 깃들 공간이 없었다. 한 일은 많지만 걱정이 없었다. 이제는 걱정은 많은데 한 일은 없다.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을 탔던 기억부터 가물가물 하고, 무엇을 먹었는지, 책상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휴양지에서의 나와 서울에서의 내가 완전히 분리된 인격체로 느껴진다.


 원초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눈 앞에 떠오르는 걱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휴양지의 날들은 걱정 따위는 잊게 해 준다. 걱정이 눈 앞에서 사라지니 무엇을 해도 즐겁고, 모든 행동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리 속에는 다양한 걱정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하나씩 흘러 나온다. 걱정이 눈 앞에 있기 때문일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걱정의 주체들이 눈 앞에 보이니 끊임없이 흘러 내리는 걱정들에 피곤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여행을 떠나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단순한 이유는 바로 걱정이 눈 앞에서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걱정이 가득한 땅을 벗어나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멀리서 바라보니 하찮은 걱정들이다. 사소하고, 편협한 생각으로 생겨났고, 단순한 문제였지만 꼭 붙잡고 있었다. 물론 다시 걱정이 있는 땅으로 돌아오니 중요해 보이고, 복잡하게 생각해 다시 머리가 아파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오늘도 사라지지 않는 걱정을 붙들고 휴양지에서의 하루를 다시 꿈꾸며 잠에 든다. 이제는 코로나로 갈 길도 없어졌지만.

이전 16화 힘 내라는 말 대신 힘 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