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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Oct 31. 2020

행복해야 한다는 프레임이 나를 망친다

행복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어릴 때 대학교 방학을 맞이해 친한 친구들과 일본의 오사카를 갔다. 그동안 친구들과 함께 국내 여행을 다닌 적은 많아도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컴퓨터 한 대만 있는 집에 모여도 즐거운 친구들인데, 함께 해외를 가니 들뜨는 게 당연했다. 숙소도 호텔이나 게스트 하우스가 아닌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단독 주택을 일주일동안 빌렸다. 숙소 위치도 신세카이라고 불리는 일본 맛집 거리 근처였다. 하루에 4~5끼 씩 각기 다른 일본 음식들을 만나며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즐기며 놀았다. 


 함께 노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지만 밥만 먹고 놀기에는 여행을 온 이유가 없었기에 이런 저런 관광지도 나름 돌아다녔다. 젊은 에너지가 넘친 덕에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오사카 전역을 거의 다 훑어버렸다. 이제 할 만한 구경은 끝났다. 한국이었다면 진작에 질려서 피시방으로 가거나 노래방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왔으면 뭔가 여행다운 여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숙소 근처에 있던 오사카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 날 오사카의 날씨는 너무도 더웠다. 34도를 웃도는 기온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는 뜨거운 햇빛이 지글대며 쏟아지고 있었다. 타 들어가는 태양이 쓰러질 정도로 뜨거웠지만, 입장료도 이미 내버렸고 오늘 하루 갈 곳도 없었다. 그래도 여행 다운 일정을 잡았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동물원 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열사병을 일으키기 정말 좋은 날씨였다. 이미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신발 밑창부터 뜨거웠고, 땀으로 젖은 티셔츠는 이미 본색을 잃고 소금기의 나이테가 등에 새겨졌다. 한참을 돌아다닌 줄 알고 시계를 보니 이제야 동물원에 들어온 지 20분이 지났다. 심지어 동물원 안에는 그늘도 거의 없었다. 우리도 우리였지만, 동물들 역시 이 날씨를 견디지 못해 쓰러져가는 듯 보였다. 특히 북극곰은 이런 뜨거운 날씨 아래에 두꺼운 털옷을 입고 얕은 그늘에서 겨우 숨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물원에서 굶어 죽어가던 동물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동물들도 버티지 못하는 이런 뜨거운 날씨에 우리 역시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갈까 고민을 해도 여행을 왔으면 고생도 하고, 여행 다운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또다시 튀어 나왔다. 언제나 생각이 드는 “뽕을 뽑자.” 라는 말이었다.


 분명 재밌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행복을 향한 길의 고단함이 지나쳐 너무나 낯선 내가 보였다. 짜증이 늘고, 서로 누가 집에 가자고 이야기를 꺼낼까 눈치를 보고, 동물들보다 그늘이 눈에 더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여행이었는데 이토록 변질되어 버렸다. 끝에 어떤 보상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과정의 고통을 보상해 줄 만큼 행복할까 싶다. 


 여행을 왔으면 “뽕을 뽑아야” 한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이미 여행을 왔다는 것만으로 이 여행에 들인 시간과 비행기 값, 여행 경비는 매몰비용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 왔으면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여행을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뷔페에서 튀어나온 배를 쥐어 잡고 억지로 한 입이라도 더 넣으려고 고생하는 어린 아이처럼 억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행복하고 재밌기 위한 길이 불쾌하다면 그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삶은 없다. 세상 모든 일들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가는 길이 모두 행복하진 않다. 굳이 내가 불행하다면 그 길을 걸어야 할까. 그 길 끝에 도달했을 때 내가 그 고통들을 모두 상쇄할 만큼의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행복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결국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길들이 열려 있다. 행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일을 하는 듯이 나를 쥐어짜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동물원에서 나와서 수영장 딸린 오사카 찜질방으로 향했다. 동네에서도 할 수 있는 수영장, 찜질방이지만 뙤약볕의 고통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어차피 여행은 재밌기 위해 하는 일이었고, 떠나면서 여행은 시작된 것이었다. 굳이 더 여행다운 일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여행을 떠난 이상 행복한 일이었고, 더 행복하기 위해 고난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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