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어린 시절 꿈은 기계체조 선수였다.
그리스의 자킨토스는 우리나라에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난파선 해변이라고 불리는 나바지오 해안에는 드라마에 나왔던 녹슨 난파선이 하얀 모래 위에 조용하게 잠들어 있다. 드라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꼭 한 번쯤 이 해안에 오겠다는 다짐은 불과 1년 만에 이루어졌다. 백사장만큼 하얀 절벽은 난파선과 놀러 온 사람들을 웅장하게 둘러싸고, 뜨겁게 내리쬐는 지중해의 태양과 새파란 물감을 푼 듯한 그림 같은 바다까지, 이 해안은 드라마에 나온 그 모습 그대로였고, 이곳에 오겠다는 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해변 투어를 끝내고 바다가 보이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이곳 자킨토스에서 나흘을 머물렀는데, 첫날 찾은 카페로 조용하지만 테라스 밖으로 바다 향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카페였다. 그 향기와 풍경이 좋아 매일 들리게 되었다. 카페를 들어가면 정면에 있는 찰리 채플린의 그림이 있었는데,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좋아한 적도 없고 자세히 본 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옆에 있는 명언이 더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해야 했을까. “Life could be wonderful if people would leave you alone. (사람들이 너를 내버려 두면 삶은 아름다울 거야.)“라는 문구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은 은근한 매력을 뿜어냈다.
카페 안에는 아직 손님이 없었다. 오후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손님보다 종원업이 많은 상황이었다. 매일 앉았던 자리에 똑같이 앉아서 그리스식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그리고 오늘 갔던 나바지오 해변에 대한 일기를 썼다. 평소에 매일 글 쓰는 일은 버겁고 힘들지만, 여행을 가면 언제나 새로운 자극과 경험이 들어오니 일기 쓰기가 수월했다. 꿈만 같았던 드라마 속 해변을 간 행복한 기억과 아름다운 해변의 추억이 날아가기 전에 잉크로 새겨 두었다.
종업원이 미소와 함께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같은 카페를 매일 오는 내가 신기했는지 커피를 내려놓으며 글을 쓰냐고 물었다. 나는 단순하게 ‘쓰는 행위’로 받아들여 그렇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쓰는 행위’의 writing 이 아니라, 작가로 글을 쓰는지 물어본 것이었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이 사람은 좋은 글 쓰라면서 자신도 내가 쓰는 이야기에 넣어 달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멋있다는 칭찬을 덧붙였다.
아니라고 정정을 해 줘야 했지만 빈약한 영어 실력 때문에 말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한 번도 남에게 말한 적 없는 꿈이 들킨 기분이라 부끄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는 일은 좋아하지만 언제나 내 꿈은 작가라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잡아먹었기 때문에 숨기고만 있던 꿈이었다. 작가는 재능을 가진 사람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작가가 되더라도 1%의 성공한 작가가 아닌 이상 재정적 압박이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부담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혹여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말을 하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웠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심정으로 나는 내가 가진 꿈을 숨겨두고 있었다. 꿈을 숨기니 나에게 꿈은 단지 삶의 계단을 오르기 위한 계획이 되어 버렸다. 취직하기, 혹은 자격증 따기, 몇 살에 결혼하기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먼 타지인 그리스에서 만난 카페 종업원이 던진 작은 말이 호수의 물이 퍼지듯 큰 파동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숨기고 있던 꿈이었지만 그의 한 마디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되짚어 주었다. 그로 인해 나의 꿈은 남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된 셈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모든 학업과 생계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잠들어 있던 씨앗에 물을 주듯, 말라서 숨겨진 꿈이라는 존재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었다. 영화처럼 이런 일을 겪으면 엄청난 삶의 변화가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다시 학업과 취업,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그 꿈이 다시 잠에 든 듯 보였다. 여행을 하며 채워졌던 자의식이 한국에서 다시 작아진 셈이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내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장 오늘과 내일 해야 할 일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귀인이 던진 한마디로 다시 살아난 꿈은 죽지 않았다. 그 그리스의 작은 섬에서의 사진을 보면, 언제나 그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나고, 그러면 잠에서 깬 꿈이 슬며시 눈을 떴다. 하지만 깨어난 꿈은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떠오르게 해주는 요소였지, 모든 노력과 시간을 바쳐 이루어 내야 하는 인생의 하나뿐인 길은 아니었다.
사람이 꿈을 이룬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러 가지는 못한다. 개인적 문제나 가정환경 혹은 사회적 시선 등 다양한 이유로 꿈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포기한 꿈은 언제나 죽어 있는 듯 보이지만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아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꿈은 놀랍게도 기계체조 선수였다. 스무 살이 넘은 시점에 여쭤본 것이었지만 처음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만 해도 기계체조 선수로 고향에서 이름난 선생에게 배우기까지 했지만, 알거지나 다름없는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하셨다. 만약 이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이었다면 재정적으로도 지원을 해주며 아버지를 아들처럼 키워줄 코치를 만나 역경을 이겨내고 국가대표가 된다는 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를 대체할 선수는 얼마든지 있었고, 아버지는 그 꿈을 포기한 채 현실을 살기 위해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단지 꿈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길을 걷다 가도 철봉 비슷한 것이 나타나면 항상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시며 당신의 몸놀림을 자랑하셨다. 그리고는 다 큰 아들에게 이런 것도 못하냐면서 내일부터 같이 운동하자는 농담을 던지셨다. 철봉 위에서의 움직임은 아쉬움이나 미련이 아니었다. 단지 사라진 꿈이 다시 깨어나며 만난 어린 시절 꿈에 대한 향수로 보였다. 결국 꿈이라는 건 영원히 사라질 수는 없다. 굳이 인생을 갈아 넣어서 꿈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잊고 살다가 이따금씩 떠오르며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