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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Nov 01. 2020

실망감이 가득한 도시

내 취향을 아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부다페스트는 로맨틱하고 황홀하기로 유명하다. 각종 매체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 TOP 3’, ‘동유럽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도시 TOP5’와 같이 소개되어 여행을 가기 전부터 수 많은 책과 인터넷, 지인들에게 추천을 받았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빠르게 도시를 구경했다. 태양을 받아 뜨겁게 빛나는 도나우강부터 요새처럼 서 있는 멋진 부다 궁전, 그리고 구시가지 안의 아름다운 성당들을 비롯해 볼거리는 많았다. 시간이 멈춘 듯 반짝이며 빛나는 강물은 눈이 부셨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흘러 넘쳤으며 휴대폰 사진에 찍힌 헝가리는 엽서 같았다.


이렇게 완벽한 도시였지만, 왠지 모르게 큰 감흥은 없었다. 보통 여행을 하여 새로운 도시를 만나면 희열이나 신기함 같은 감정이 올라오는데, 이 도시에서 그런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다. 몇 주에 걸쳐 같은 문화권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 도시에 매력을 찾지 못했거나 너무 짧은 체류기간 때문에 아직 빛나는 모습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미 다녀온 친구들이나 인터넷 지인들은 부다페스트에서 본 멋진 풍경들을 예찬하며 빼 놓지 말라고 사정하다시피 추천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부다페스트는 버스를 타고 지나쳐온 시골 소도시와 다를 바 없는 도시였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가슴이 울리는 순간도 없었다. 너무 큰 기대감과 여행을 갔으면 당연히 남들 다 가는 풍경을 봐야 한다는 강박심이 문제였나 싶기도 했다. 남들이 이 도시를 예찬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서 야경을 봐야 예쁜지, 어디가 사진이 잘 찍히는 포인트인지 미리 공부도 했었다. 꼭 가야하는 레스토랑이나 명소도 둘러봤지만 도시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결국 부다페스트에 머무른 지 3일만에 허무한 마음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떠났다.


 헝가리 바로 밑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와는 다르게 모든 도시, 모든 풍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수도인 자그레브는 마치 유화처럼 알록달록 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들이 살 것 같이 생긴 폭포와 숲에 눈이 돌아갔다. 차라리 부다페스트가 아닌 여기에서 시간을 더 보낼 걸이라는 아쉬움이 생겼다. 



 줏대 없이 남들이 가는 관성대로 따라 가느라 내 귀중한 여행 시간이 낭비되었다. 어찌 보면 여행은 단기간에 고투자로 행복을 얻기 위한 길이다. 짧은 시간동안 비싼 돈을 내 최고의 효율을 뽑는 방법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 남들의 눈과 귀를 빌려 여행지를 선택했다. TV, 책, 인터넷 등 수 많은 매체들을 통해 쏟아지는 추천으로 여행지를 고르면 최소한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 장소가 예쁘니 사람들이 몰리고 나는 따라갔고, 어느 레스토랑이 좋으니 나는 따라갔다. 내가 보고싶은 여행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내 취향이나 주관보다 중요한 건 실패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단 여행 뿐만이 아니다. 영화를 볼 때도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보단 평점을 보며 고른다. 누구 감독이 만들었으니 혹은 누구 배우의 연기력은 믿을만하니 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선택의 이유였다. 식당을 가기 전에도 인터넷으로 평가를 확인하고 다녔다. 어떤 식당은 누가 추천했으니, 어느 방송에 나왔으니 따위 만이 고려 대상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나쁠 건 없다. 선택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줄여 준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 서비스의 품질이 내가 지불한 값어치를 못할 수도 있고, 상품의 품질이 기대 이하일 수도 있다. 무작정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남들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 만이 옳은 길도 아니다. 이유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알지만 의견을 듣는 것과 내 취향도 모르면서 좇아가는 건 다르다. 후자는 맹목적인 추종이 된다. 하지만 전자는 선택의 기준이 '나'이기에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맹목적으로 남들이 보니까 따라 보고, 남들이 가니까 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을 하게 된다. 내가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건 내가 나의 기호를 안다는 것이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건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알아야 나의 행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슬프거나 힘들 때 나의 취향을 알고 고르는 선택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조금의 행복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지친 하루를 끝내고 편의점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라면을 선택하고 집에서 먹으면 '아 이거 사기 잘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내 선택으로 고른 라면의 행복도 이렇게나 만족스러운데 다른 선택들은 어떨까.

 

 여행을 해도 단순히 남들의 길을 가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택할 수 있고, 밥을 먹어도 평점이 높은 음식을 고르는 것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들이 힘들 때 내가 좋아하는 길로 나를 이끌어 준다. 결국 취향을 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아는 것을 넘어 내가 밝혀낼 수 있는 행복을 향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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