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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Oct 06. 2020

성벽이 나를 갈라두었다

새로운 적응이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나아가기엔 새로운 정보가  없기 때문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동유럽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구시가지 안에는 붉은 지붕의 오래된 건물들이 촘촘하게 서 있고, 건물들 사이로는 대리석 바닥이 넓게 펼쳐져 있어 영화에서만 보던 중세 시대에 도착한 기분이 든다. 동유럽의 도시들은 대개 이런 분위기와 유사하지만 웅장한 성벽, 성벽 밖으로 펼쳐진 맑은 바다, 그리고 중세 시대의 건물과 요새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분위기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 특히 바다와 산 모두에게서 도시를 지키고 있는 성벽과 요새라는 독특함 덕분에 도시는 ‘스타워즈’나 ‘왕자의 게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성벽은 분위기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성벽은 사람들을 갈라 둔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자동차가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이라 주변 풍경보다는 서둘러 걷기 바쁘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도로 바로 옆에는 빛나는 아드리아해가 태양빛을 흠뻑 머금고 어지러울 정도로 푸른빛을 내뿜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 또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시가지를 향해 발을 재촉할 뿐이었다. 일상 속에서 지나치는 풍경과 흡사하다.


 반대로 성벽 안으로 들어서면 아스팔트 대신 대리석이 깔려 있고, 크로아티아인보다 다국적 관광객들이 각자의 다양한 언어와 함께 열심히 거리를 활보한다.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천천히 걸어가며 도시의 이색적인 풍경을 즐기기 바쁘다. 일단 성벽 안으로 들어온 이상 모든 풍경들이 소중해지기 때문에 하나라도 꼼꼼히 보고 즐기고 맛본다. 벽에 쓰인 낙서나 길거리 식당도 한번 더 보게 된다. 


 요새처럼 이 도시를 완벽히 둘러싼 성벽 때문에 안쪽 세상과 바깥세상은 동 떨어져 이질적인 세계처럼 되었다. 벽으로 단절된 두 세계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하지만 두 세계가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연결되어 있지만 단절되어 있는 아이러니가 끈처럼 이어져 있다.



 흔히들 삶을 묘사할 때 계단을 올라간다고 한다. 시간적으로 10대에서 20대로, 20대에서 30대로 한 단계씩 올라가기도 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취업, 결혼같이 일렬의 단계를 걸어 올라가듯 말한다. 하지만 삶은 하나씩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다고 대학교를 가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하다 대학교를 갈 수도 있었다. 또,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고 그곳에 평생 머무르는 것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계단 끝이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슬픈 비유였다.

    

 때문에 언제나 삶은 꾸준히 마주치는 성벽 같았다. 다양한 선택의 문이 존재했지만 결국 열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인 성벽이었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을 선택해야 했다. 성벽은 겹겹이 쌓여 언제나 선택의 문제를 내게 던져 주었다. 선택의 결과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서 미리 보고 싶어도 굳건한 벽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은 열려 있어서 아무 고민 없이 선택했고, 어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끊임없이 두들겨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나왔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만난 건 대학교였다. 처음 만난 캠퍼스는 말 그대로 큰 성 같았다. 정문부터 엘리베이터 없으면 오르지도 못할 만큼 거대한 건물이 자리 잡았고, 언덕 위에는 더 높은 건물들이 있어 올려 보기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학교 5층 건물만 덜렁 있던 고등학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살던 공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에는 수십 배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얼이 빠진 채 정문에서 학교를 보던 내 모습은 도시에 처음 도착한 시골쥐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단절된 기분이었다. 이상한 괴리감이 생겼다. 내가 선택해서 연 문이었지만,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몰랐다. 벽을 만나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한 번 선택하면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벽 안으로 들어가도 이게 내가 생각하던 삶이 맞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새로운 적응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했다. 앞으로 나아가기엔 새로운 정보가 없었다.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현재 사는 세계에 대한 정보는 미미하고 이전 세계에 대한 정보만 있으니 새로운 삶의 적응이 어려웠다. 그러니 뒤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을 통과한 나는 과거와 동일한 존재였지만 단지 새로운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혼란스러웠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성벽 안으로 들어가서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즐기고 이런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도시에 대한 모든 풍경과 정보를 얻은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어떤 성벽에서 바다를 봐야 아름다운지 생각도 해보고, 골목마다 있는 다양한 식당들도 눈여겨보며 도시에 나름대로 적응해갔다. 새로운 인생의 성벽을 뚫고 난 이후에도 적응이 필요하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도 내가 적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돌아보면 적응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었을 땐 차라리 완전히 여행의 기분으로 눈을 돌렸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기함이나 이전과 바뀐 점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두려움은 정보가 없어서 생겨났었다. 단지 바뀐 세상에 살고 있으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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