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생활은 동경과 선망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해외에서 일을 하던, 공부를 하던, 아예 눌러살고 싶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묘한 동경과 선망이 있었다. 새로운 문화 안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정확히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산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유럽도 좋았고, 아메리카도 좋았고, 아프리카도 좋았다. 나이가 먹어서도 생각의 변함은 없었다. 대학교 동기들은 무슨 일을 한다는 직업으로의 목표가 있었다면, 나는 무슨 일을 해야겠다 라는 확실한 목표보다 해외로 떠나서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가기만 하면 삶이 언제나 재밌을 것 같은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 골목에는 한식당이 있다. 직원들은 현지인들이었지만 사장님은 한국인이었다. 크로아티아 물가를 생각하면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라면에 김치라는 뻔하지만 그리웠던 조합을 만날 수 있었다. 점심을 이 한식당에서 해결하고 나서 구시가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이후 저녁 시간이 되기 직전에 다시 한식당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한식이 그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커피만 마시는 유럽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식당이었기에 저녁을 먹기 전에 다시 돌아가 시원한 테라스에 앉아 커피와 함께 앉아 있었다.
식당이 가장 여유로운 시간에 테라스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심심하던 사장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사장님은 2~3년 전 한국을 떠나 크로아티아에 정착하신 분이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렇게 멋진 도시에 정착하다니,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머리를 흔들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저는 이 나라에서 50년을 살아도 이방인이에요.”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만만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한식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향수, 타지에서의 어려움, 색다른 문화의 적응 등 산더미 같은 문제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말한 문제들 중 제일 힘든 점은 다름 아닌 그 나라의 사회에 녹아들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사장님은 우리 사회라는 단단한 껍질 밖으로 나가 크로아티아라는 새로운 사회에 정착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의 껍질에 정착할 수는 있어도 껍질 안의 사회로 들어가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었다. 사회에 새로 들어가려는 외부인들에게 그 나라의 생소한 문화와 의식주는 힘들더라도 적응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경제적 활동도 힘들더라도 이내 적응할 수 있다.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의 적응하기 위한 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장님도 크로아티아어라는 공용어도 배우고, 현지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극복하지 못한 문제들로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완전히 융화될 수 없었다.
언어와 의식주를 뛰어넘으니 그 문화 속에서만 살던 밈(meme)이나 농담, 뉘앙스라는 산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든 산을 넘어도 ‘재미’나 대화에서 관점의 차이가 나타났다.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리더라도 핀트가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했다. 때문에 언제나 껍질에만 머무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껍질은 바로 보이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합법적으로 입국해서 미국에서 사는 남자지만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그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더라도 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방송하는 크로아티아인 방송인은 어느 날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친해져도 어차피 외국인이니까 라며 벽을 치는 느낌이 있다. 그런 거 많이 겪었다. 그리고 그래서 나도 굳이 한국에 융화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걸 인종차별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 되지? 내가 한국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그냥 쟤는 다른 존재라고만 규정된다.” 크로아티아에 사는 한국인이 겪던 문제를 한국에 사는 크로아티아인과 똑같이 겪고 있었다. 그들은 그냥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두 국가의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해서도 아니고(물론 존재하는 측면도 있지만), 타민족에 특별히 거부감을 가지기 때문도 아니었다. 개인이 타지에 와서 사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사회도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외부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이런 이방인이라는 타이틀과 외부인이라는 프레임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드리아해가 멋지게 펼쳐졌고 붉은 지붕과 하얀 대리석이 보석처럼 뜨거운 태양에 빛나는 풍경에서 사는 것이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좋지 않냐고 물었다.
풍경은 2주만 있으면 눈에 익어서 특별함이 없어져요. 관광객들이야 왔다가 떠나는 입장이니 특별한 감정을 집어넣어서 더 멋진 장소로 기억하죠.
이민, 해외 취업 등 한국을 떠난다는 결정은 결국 한국에서 당연하고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이별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이별은 이제 나를 이방인으로 보는 사회의 겉껍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단지 풍경만 보고 살 곳을 정하는 일은 영화 엔딩에서만 나오는 일이었다. 결국 향수병은 속해 있던 문화가 그리워서 뿐만 아니라 그 단단한 사회의 껍질을 깨지 못하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목표가 명확한 사람들도 사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살며 향수병을 겪는데, 목적 없이 단순한 동경 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외지인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은 막연한 환상이 아닌 고달픈 현실이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