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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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래서 나는 꽃을 선물하기 싫어했다. 한 번은 꽃을 사주지 않는다고 싸웠다. 유치한 사랑놀이로 치부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 논리가 있었다. 만나서 꽃을 주면 하루 종일 꽃을 들고 다녀야 하고, 집에 가져다 두어도 시들어버리니 버리기 힘들다. 그러니 꽃을 선물해줄 바에 더 오래가는 무언가 선물해주거나 좋은 식당이나 여행에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좋은 선물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보다는 내가 선물해준 무언가가 짧은 화려함을 마치고 쓰레기통으로 간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준 선물이 그녀에게도 영원하길 바랬다. 모든 물건은 수명을 다하면 끝이지만,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결국 내 손에 떠났어도 떠나지 않고 영원하길 바랬다. 나라는 경계 안으로 들어온 그 무엇도 내 곁에서 떠나지 않길 바랬던 이기적인 욕심은 금세 끝이 나고 말았다. 아무것도 나가지 못하게 막았더니 그 안에서 곪아 썩어 없어졌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인 마츠코 역시 언제나 외로웠다. 파괴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은 일생을 외롭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혐오스러운 마츠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마츠코는 유년 시절부터 죽기 전까지 언제나 외로움을 덮고 싶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받기를 원했다. 어린 시절에는 아프던 동생 탓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가슴 한편이 빈 채로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공간은 채워지지 않은 탓에 마츠코는 언제나 외로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갈구했다.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라도 사랑을 원했다. 그리고 그 탓인가 그녀의 인생은 바라보기에 혐오스러울 정도로 끔찍하게 흘러갔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녀지만 사랑에 대한 애착은 너무 기괴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고 스스로 여기던 소설가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는 스스로도 사랑하기 어려운 남자인 탓에 자살을 해버린다.
외로움에 끌어 앉은 다른 남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츠코는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다. 엘리트 중학생 교사에서 살인자까지 추락하는 그녀의 신분과는 다르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단 하나, 자신을 사랑해줄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을 다 바친 마츠코의 슬픈 인생은 결국 마지막까지 사랑받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소유의 사랑과 정 반대되는 개념은 바로 희생의 사랑이다. 완전한 희생의 사랑은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나에게 해 주었던 모든 감사한 사랑이 이런 희생의 사랑이었다. 온전한 당신의 삶을 모두 바쳐 나를 완성하였다.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버티고 부질없는 짧은 보답조차 바라지 않은 채 언제나 몸을 바쳤다.
안타깝게도 마츠코는 이런 희생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면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이런 그녀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기도 했다. 나 역시 이기적인 희생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거운 의미를 함부로 남발한 셈이었다.
나는 단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집착했다. 나는 과연 사랑하고 있는가. 마츠코는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을 외쳤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은 차갑게 비어 있는 사랑이다. 마츠코는 과연 사랑하고 있었을까.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외로우면 나의 것으로 만드려고 하니 사랑할 수 없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그다음 사랑을 외쳐야 한다. 사랑으로 사랑을 극복하기에는 상대에게 너무 큰 희생을 바라는 셈이다. 혹은 정 반대로 마츠코처럼 자신의 피와 살까지 바쳐가며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진정으로 사랑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겨 나야 한다.
세상 모든 마츠코들이 서로 희생하며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