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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강 한 복판에서

러시아 여행기 -29

by 박희성

네바 강을 건너 드디어 이름도 어려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도착했습니다.

작은 나무 다리만 건너면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표토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요새는 북쪽에서 러시아를 위협하는 스웨덴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는데요,

이 요새의 건설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점 현재와 같은 도시의 면모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23782734608.jpg?type=w773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

날씨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해가 점점 머리위로 갈 수록 요새 안의 황금빛 성당은 더욱 빛을 내고 있습니다.

이 성당은 요새 내 가장 먼저 착공된 건물이며 무려 20여년간 지어졌습니다.

안에는 표토르 대제를 포함해 예카테리나 여제,

최후의 차르인 니콜라이 2세까지 로마노프 왕가의 대부분의 황제와 황후가 잠들어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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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벽 밖을 구경하기 위해 나서는데,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려옵니다.

순간 머리 속에 수 많은 생각들이 맴돌았습니다.

폭탄테러를 주변에서 겪으면 이런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큰 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려봤는데 의외로 침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고보니 이곳 요새에서 정오를 알리는 대포를 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대포소리를 들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놀랍기만 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밖으로 나오니 평안하게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저에게는 놀라운 경험이 여기서는 일상 속 작은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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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요새는 완성 직후부터 정치범 수용소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강 한가운데 있는 요새다 보니 탈출은 엄두도 못냈겠네요.

이런 요새에 수용된 사람을 보여주는 재미난 모형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은 이 단두대같은 칼에 목을 집어 넣고 사진을 찍습니다.

재미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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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요새 성벽으로 이동했습니다.

넓은 네바강과 강 반대쪽에 위치한 겨울 궁전이 보인다는 성벽입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걸어다녀 힘도 들고 배도 고파졌습니다.

어차피 다리 위에서 보는 풍경과 다를 것 없어 보입니다.

탈무드의 여우처럼 '저 포도는 실꺼야' 라고 저 자신과 타협하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이 교활한 여우는 여행 내내 한번씩 나타나서는 제 계획을 망가뜨리는 작은 악마였습니다.

하지만 이 여우에 속아 넘어간 저도 언제나 자기합리화를 했지요.

오늘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닥 힘든 일정은 아니었지만 그만 둘러보고 쉬고 싶어졌습니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할 마음으로 네바 강을 건너는데 여기까지 와서 쉽게 지치는 저를 보면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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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반쯤 건너는데 다리 밑에서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궁금증이 생겨 한 번 내려가 보았습니다.

늙은 화가는 주변에 어떤 사람이 와도 방해받지 않고 빛나는 이 풍경을 자신의 그림에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요.

세상의 눈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라보고 있더라도 상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을 왔다고 해서 꼭 모든 것들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스스로 위축되었을까요.

다리를 올라와서 다시끔 걷는데 아까보다 훨씬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중요한건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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