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_5.

by 김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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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_5.


회식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집 밖에서 마신 술은 날 힘들게 했다. 집 안에서 술을 마시면 그냥 쓰러져 자기만 하면 되었었는데, 술에 잔뜩 취해 집까지 돌아가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취해버렸는지….

‘누가 술에다 약을 탔나? 약을 탔으면 유진이 탔을 거다.’

갑작스레 든 생각에 우스운 마음이 들어 미친놈처럼 킥킥거리다 전봇대 앞에 머리를 박았다.

회식은 유쾌했다. 다들 오랜만의 회식이라 한껏 먹고 마시고 취했다. 처음엔 회식이라는 자리가 꺼려졌지만, 그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권해주는 술을 빼지 않고 마셨다. 내가 주량이 늘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재밌어했다. 원래 술자리를 잘 가지 않았기에 이런 분위기가 신선하게 느껴진 탓도 있었다. 평소 회사에선 말이 없던 내가 마음껏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차장이 특히 좋아하며 연신 내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옆에선 유진이 더 마셔도 되는 거냐며 걱정스레 속삭였지만 난 못 들은 체 마셔댔다. 주량이 늘은 탓에 이젠 차장도 술로는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내 앞의 소주병은 네 병이나 비었다. 사람들은 제각각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차 자리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술잔을 따라주거나 말을 붙여주는 사람이 없어지자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찬 바람이 부는 밖은 여전히 추웠고 목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화장실’이라고 쓰인 벽을 지나서 화장실 입구 문을 열려는데 그 문에서 유진이 튀어나왔다. 주춤하는 나를 보고 유진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팀장님답지 않게 왜 이리 술을 많이 드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일없습니다.”

마지못해 답하고 화장실로 들어서려는데 유진이 갑자기 앞을 막고는 내 와이셔츠 깃을 털어주었다.

“어머, 얼룩이 졌네요! 안 지워지네…. 이게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유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그녀의 손이 목덜미에 스치고, 깜짝 목을 웅크리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유진의 손이 내 뺨에 닿아버렸다. 그럴 것도 없는데 급작스레 이상한 공기가 흘렀고 난 도리질 치며 뒤로 물러났다. 유진도 당황한 듯 잠시 날 쳐다보더니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는 듯 또다시 슬쩍 웃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은 채 난 유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후임 주제에….’

기회가 닿을 때마다 민망한 분위기를 만들고 내게 장난치는 유진이 얄미웠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장난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런 가벼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때론 마음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처럼….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등 아래로 하늘거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동그란 얼굴형을 가진 유진. 미소가 보는 이에게 상쾌함을 안겨다 주는 그녀. 그나마 회사에서만큼은 웃을 수 있는 이유 또한 유진이 내 옆에 있어 주어서가 아니었을까. 매 순간 절망적이었지만 회사에 있다 보면 마음을 옥죄던 무게가 조금씩 가볍게 바뀌는 것도 실은 유진 덕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눈앞에 유진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엔 그저 아리따운 처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허벅지가 반절이나 하얗게 드러난 남색 스커트 차림의 유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의 얄팍한 허리와 봉긋하게 솟은 가슴, 입꼬리가 상쾌한 붉은 입술을 떠올리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꿈틀거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대서 있던 전봇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드디어 미쳐가고 있구나…. 나는 미쳐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되뇌면서 아파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에 들어서 현관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닫자 안방에서 인애가 나왔다. 화장기 없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질끈 묶고는 온몸에 물기를 쥐어짠 것처럼 어깨가 축 처진 인애. 인애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에 왜…? 인애는 전보다 더 말라 보였다. 인애를 보자마자 유진에 관한 생각은 싹 사라졌다. 그토록 보고 싶던 인애가 집 안에 있으니 반가움이 일면서 머릿속은 환해지는데, 당황한 탓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인애는 나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술 마셨어?”

“오늘 회식이 있어서 좀 마셨어.”

인애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베란다에 저건 뭐야?”

‘아, 들키고 말았구나.’ 소주가 담긴 박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말이 없자 인애는 이젠 내 시선을 피한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녁은 먹었어?”

나는 그만 멋쩍어져 대답 대신 인애에게 물었다. “어”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현관 마루에 던져놓은 채 인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 진짜 왜 이래!”

짜증스레 나를 밀어내면서 인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인애는 여전히 서늘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어둔 가디건과 가져온 짐을 챙겨 들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은서 수술 있는 거 알아, 몰라?”

인애의 말에 가슴이 또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내일이 은서의 수술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이번 주가 되니 잊고 말았다. 인애는 그럴 줄 알았다는 콧방귀를 끼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인애의 눈이 빠르게 젖어 들어간다.

“은서가 예전에 산 인형을 찾길래 잠깐 가지러 왔어. 근데 집안 꼴이 이게 뭐야. 청소 좀 하고 살아. 설거지도 좀 하고. 보다 못해서 설거지만 좀 했으니까 청소는 당신이 해. 생선이랑 군만두, 동그랑땡 사서 냉장고에 넣어놨어. 꺼내먹어.”

말을 마친 인애는 내가 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곁을 지나쳤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 인애의 팔을 겨우 낚아채듯 붙잡았다. 팔을 잡혀놓고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인애 앞으로 톡톡,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현관 바닥이 금세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 순간, 나라는 인간은 참 쓸모없어 듯 보인다. 그야말로 무용지물.

“미안해. 내가 내일 일찍 병원으로 갈게.”

“당신은 아빠가 될 자격도 없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애는 내 손을 뿌리치고 현관을 나섰다. 나를 코앞에 두고 문이 세차게 닫혀버리며 도어락 소리가 귀에 쨍- 울렸다. 기가 막혔다. 인애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온몸에 피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셔츠를 탁자 위로 집어 던졌다. 어제 먹다 남은 소주를 찾아 안에 든 내용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리곤 스마트폰을 찾아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기침하면서 메인 목을 가다듬었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데요, 미안해요. 그런데 지금 반찬 좀 가져다주었으면 해요.”

숨도 쉬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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