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났다. 족히 8시간은 지나 있었다. 멍하니 소주병 입구에 붙은 먼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녀가 씻으려 일어났다. 얼마간 침대에 앉아있던 나는 아침을 준비했다. 그녀가 가져온 반찬거리를 골고루 덜어 식탁에 내놓으니 그런대로 다채로운 밥상이 되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온 유진이 식탁 앞에 앉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지만 속눈썹이 길다. 우리는 다시 또 아무런 말 없이 밥을 먹었다. 그러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유진이었다. 불현듯 자기도 외로웠다고 말하고 있었다. 묻지도 않은 유진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밥그릇만 열심히 비울 뿐이었다.
밥을 다 먹은 뒤 유진은 집을 청소하려고 했다. 청소기는 돌리지 말라고 하니 어질러진 물건들만이라도 치우고 가겠다고. 치우기보단 비어버린 공간에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그녀의 모습을 설거지하면서 몇 차례 뒤돌아보았다. 어제의 시간이 별일이라도 되는 양 집에 가지 않는 그녀가 나는 어쩐지 불편했다.
유진은 거실 의자에 앉아 설거지하는 나를 기다렸다. 유진의 모습을 눈으로 뜯어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더럽고 낡은 집에 농후한 자태의 파릇한 화초가 놓여있는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어젯밤처럼 밀쳐내지 않고 그대로 키스를 받는 그녀의 입술을 빨며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오히려 어젯밤의 대담하던 나와는 달리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까부터 떠오르려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소스라치듯 전화벨이 울렸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만 있던 나에게 유진이 얼른 받아보라고 재촉했다.
“여보세요?”
“○○병원입니다. 이은서 양 보호자 이진혁씨 되십니까?”
“예….”
“오늘 오후 1시 12분 이은서 양이 사망하였습니다. 속히 병원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웬 남자의 목소리가 처음에 뭐라고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급박한 상황으로만 느껴질 뿐. 전화를 받기 전부터 심장은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뚝, 나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는 다시 ‘속히 병원으로 와달라고’ 반복해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신호음이 천천히 현실로 되돌아오게 해주는 것 같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둘 데가 없어 바닥을 내려다보니 식탁보 아래로 유진이 차마 치우지 못한 술병들이 보였다. 술병을 들어 올린다. 입구엔 여전히 먼지가 진득하게 붙어있었다. 먼지…. 먼지를 보고 있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나는 절대로 이 먼지처럼 따스한 온기를 지닌 사람이, 그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될 수 없다. 나의 아이에게마저도 온기를 전해줄 수 있는 자격 모두 잃고 말았다.
쨍그랑!
술병이 깨지자 가만히 있던 유진이 소리를 질러댔다. 깨진 술병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나는 정말,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럽고 두려웠다. 아이는 아빠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어딘가에서 아이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서 있기조차 고통스러웠다. 비틀거리다 깨진 술병을 밟으니 방바닥에는 곧 피가 흥건해졌고 놀란 유진이 달려왔다.
“나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달려오던 유진이 내 얼굴을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발이 욱신거렸으나 알지도 못할 어떤 감정들이 온몸을 채우고 나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실에 놓인 그녀의 윗옷과 함께 유진의 등을 현관까지 떠밀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며 소리를 질러대는 유진은 꼼짝도 못 한 채 나에게 붙잡혀 현관까지 질질 끌려갔다. 바닥엔 이미 빨간 자국이 여러 개. 현관 밖으로 내몰다시피 유진과 그녀의 물건을 던져버리고 문을 닫자 그녀가 내 이름을 요란하게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이성이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현관 앞에 있던 술병 하나를 들어 문을 향해 던지니 그 뒤로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요란한 소리의 메아리가 집안을 훑고 지나간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다시 또 술병을 들어 현관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이번엔 파편이 튀어 옷 아래로 드러난 발등과 발목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인애와 은서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한 가운데 인애가 동그마니 상체를 숙이고 침대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간호사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발견하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갔다. 그 겨를에 흐느끼던 인애가 나를 돌아보고는 비명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인애를 보아야 할지 몰랐다. 아이는 꿈을 꾸듯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아이의 눈가와 입가가 핏줄이 비쳐 파리하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들었지만, 묵직한 느낌도 없이 아이를 안은 팔이 가슴께로 훅 치솟았다. 나는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인애의 울음소리 위로 흐느낌이 더해지고, 은서의 얼굴과 가슴 위로 눈물이 마구 떨어졌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은서에게 뭐라고, 자꾸만 뭐라고 속삭이는 것 외에는. 입속을 맴돌던 실낱같은 말은 겨우 한 문장이 되어 나왔다. 미안하지만 아빠는 살아야겠다고, 너를 잃고도 아빠는 할 일이 많다고. 잊지 못할 이 일을 두고 평생 사죄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희 엄마만큼은 꼭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은서야, 부끄럽게도 아빠는 너를 잃고도 할 일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