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를 보낸 우리는 바로 우리가 살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혁은 여전히 그 먼지와 곰팡이가 가득한 집에서, 나는 친정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 달을 떨어져 지냈다. 한 달 하고도 며칠 뒤 그가 나에게 먼저 만나자는 말을 건넸다. 그래, 만나긴 해야지. 이젠 그에게 남아있는 감정 따위 없었다. 그를 향한 감정은 그저 무(無). 아무런 원망도 미움도 슬픔도 없다. 난 백지상태가 되어있었다.
집에서 만난 우리는 그간 돌보지 않은 집을 정리했다. 모든 것이 처음과는 다르게 틀어져 있었다. 음식물 찌꺼기가 범벅이 된 채 가득 쌓여있는 접시들이 그랬고, 방바닥에 뽀얗게 쌓인 먼지가 그랬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소주병이 그랬고 철이 한참 지난 진혁의 양복이 그랬다. 가전에 쌓인 먼지, 원래부터 어떤 형질의 액체였는지도 모르겠는 진득하게 얼룩진 자국들. 아무리 걸레로 문질러 닦아도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앞으론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일주일 이상을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도통 대화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또한 백지상태가 된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우린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함께 서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런 그의 모습 또한 나에게 어떠한 감정도 전해주지 못했다.
며칠 뒤 그는 또다시 내게 먼저 다가와 대화를 좀 하자고 말을 건넸다.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은 조금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래, 망설이는 그를 위해서라면 내가 먼저 또렷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생긴 나는 그에게 ‘우리 이혼하자’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나의 눈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평온해진 그의 얼굴을 보며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내심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에게 ‘그래’라고 대답했다. 대신 우리 둘이서 여행이라도 한번 가고 싶다고. 나는 그의 바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서로를 앞에 두고 앉아있는 여기는 보성, 도대체 삶이란 무엇이기에 우리를 이 사태까지 몰아넣었는지. 그러나 동시에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평온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국밥을 떠먹는 진혁의 얼굴을 계속 시선으로 좇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낀 그는 어서 먹으라며 나의 숟갈에 김치를 얹어주는 것이었다.
국밥집에서 나온 우리는 버스를 탔다. 정오가 되자 날씨는 더워졌다. 나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버렸고, 진혁은 남방셔츠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녹차밭에 도착하기 전까지 달리 할 것이 없어진 우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서로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다.
창밖 너머로 나와 함께 앞으로 달려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아까 기차 안에서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잔잔한 미성으로 내게 노래를 불러주던 모자 쓴 소년. 아마도 그 꿈을 꾸게 된 이유는 지금, 보성에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보성에 왔던 적이 전에 딱 한 번 있다. 아까 꿈에 나왔던 그와 함께….
그는 내가 학생 시절에 사랑하던 이였다. 언제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장난기 많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대학생이었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그는 신입생으로 갓 성인이 된 나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소년’에 훨씬 더 가까운 이미지다. 그 시절의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영락없는 아줌마. 세월이 이렇게 흘러버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또 다른 이유는 창밖을 보며 눈에 담기는 모든 풍경이 정겹게 느껴진 탓도 있었다. 어느 하나 지나칠 것 없이 모두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이다. 그때도 그 소년과 함께 보성에 와서 녹차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었는데. 그래서인가? 애초에 모자 쓴 소년과 보성에서 함께 보냈던 추억 그리고 이곳 보성의 풍경이 뇌리에 깊게 박혀있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그때의 추억은 기억 가장 안쪽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진혁과 함께 누운 침대 안에서, 진혁이 야근을 하는 바람에 밤중 집에 혼자 있을 때라던지, 따뜻한 물수건으로 조그마한 은서의 몸을 씻겨줄 때, 이제 막 말을 시작해 재잘거리는 은서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일 때. 그리고 병원에서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몇 번이고 받지 않았을 때도…. 인생의 사소한 부분에서 소년과 보성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일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떠올려져서 간혹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혼 생각을 전한 그날 밤에도 그랬다. 진혁이 여행지는 내가 정하라기에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보성으로 가자고 했다. 그 소년이 그리워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