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단이 Aug 25. 2023

나를 위한 기록

 

 스마트폰에 일정을 적어두는 것보다 다이어리에 직접 필기하며 기록하는 걸 선호한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을 때도 다이어리가 없으면 약속 날짜를 정할 수 없다. 매번 가방에 다이어리를 챙기거나 꺼내 보는 일이 다소 번거롭긴 해도 책처럼 한 페이지씩 넘겨 가며 쓰는 다이어리가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다이어리는 위클리 페이지가 있는 것만 사용하는데, 매일 일기는 아니고 하루에 있었던 일이나 느낀 점, 단상 등을 꼭 한두 줄씩 혹은 두 페이지 이상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그러나 정신이 없었던 걸까…. 위클리 기록은 5월 17일부터 끊겨있었다. 벌써 8월이 지나가려고 하는데도. 귀찮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쓸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에 한 줄이라도 쓸 것이 없었다는 건, 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난 알 수 있다.


 다이어리의 맨 앞장에 자리한 일정표를 넘겨다보며 새삼스레 5월 18일부터 위클리를 기록해갔다. 이미 지나간 하루들을 떠올리며 마치 오늘 쓴 것인 양. 3개월간의 그 많은 빈칸을 모두 채우진 못했으나 달력과 인스타그램 과거 스토리들까지도 살펴보면서 생각나는 일들과 감정을 다시 채워나갔다. 기억이 나는 날짜의 빈칸만 채웠음에도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누가 보면 이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나 싶겠지만 나에게 이 위클리는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보기 위해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부터 써 온 일기들은 모두 집에 간직하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 10여 년 동안 써왔던 다이어리들도 대부분 지금까지 갖고 있다. 물론, 연도별 순서가 뒤섞여버리긴 했지만. 고등학생 학창 시절 전까지의 일기들은 그냥 어린 내가 했던 생각들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재미있는 시절의 일기는 성인이 된 이후 쓴 것들이었다. 왠지 모르게 고등학생 때보다 더 병맛이고, 창피하고, 재밌다. 그리고 읽다 보면 성인이 되기 전 일기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안타까움이 슬그머니 가슴속에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금 그때의 감정이 몰려오듯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3년 이상 오래된 일기장은 사실 웬만해선 펼쳐보지 않지만, 여름에서 넘어가는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괜스레 올해 초부터 정성스레 적어나갔던 감정기록과 단상을 다시 읽었다. 그땐 모르고 지나쳐왔던 또 다른 감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일은 새로운 글의 주제가 되어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도 모른 척하고 넘겼던 내 감정이나 나의 모습을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너 왜 5월 중순부터 글을 못 썼니?


 과거의 나인 척 위클리를 써 내려가며 나에게 묻는다. 5월 이후의 나인 척하며 6월과 7월의 빈칸을 적어 내려가다가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9월을 준비하고 있던 8월의 나는 그만, 6월과 7월의 나를 갑작스레 만나게 되어 당황스럽다.


 이제 만났으니 앞으로는 계속 기록해줘.


 5월 이후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기록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아무리 과거의 ‘나’라고 하더라도 위클리를 쓰지 못한 뚜렷한 이유는 모른다. 이유를 알더라도 100%까지 알 수는 없단 얘기다. 똑같은 주체를 가진 사람이어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했을 때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아마도 그랬기 때문’일 것이란 미적지근한 추측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나의 할 일은 계속 기록해 나가는 일. 약속은 했으면 지켜야 한다.



23.08.25.

_

나를 위한 기록

작가의 이전글 팔꿈치가 된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