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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이 Aug 30. 2023

등 긁어주는 일


 대학생 시절, 전공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시를 배우는 강의에선 매주 시를 써오는 것이 과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이 ‘사랑’이라는 단어나 어휘를 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시를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셨다. 한 주간 나는 열심히 고민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다. 한 여배우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난 오빠를 마쉬멜로우 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화면 속 세트장은 순식간에 발랄한 웃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마쉬멜로우 해. 여러 번 떠올려도 귀여운 표현이었다. 입안에 달콤한 마쉬멜로우가 있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혀를 움찔거릴 만큼.


 그렇다면 나는 어떤 언어로 사랑을 말해야 할까? 여러 번 고민해도 쉽사리 떠올려지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는 것은 많았으나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줄이 없는 연습장에 몇 번을 쓰고 지우다가 강의가 있는 당일이 되어도 나는 시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꼼수를 썼는데, 강의 시간 도중 잠깐 자리를 비워 도서관에 달려가곤 했다. 문예창작학과 강의동은 도서관 옆에 자리하고 있어 이 꼼수가 가능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후다닥 5분 만에 시를 쓰고 인쇄하여 교수님께 제출하는 것이다. 그 강의는 교수님께서 출석을 부르기 전에 미리 인쇄한 과제 페이퍼를 직접 제출하는 식이었다. 물론 지각하면 중간에라도 과제를 제출할 수 있다. 그리고 교수님께선 쌓인 페이퍼 순서대로 이름을 부르셨고, 즉석에서 글쓴이가 나와 시를 읽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평가하며 첨삭해주시는 방식이었다. ‘사랑’ 시를 써야 하는 과제를 맞닥뜨리고 한 주를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날려버린 나는 이번에도 꼼수를 써야 했다. 출석 체크만 하고 화장실 가는 척 강의실을 빠져나와 도서관에 달려갔다. 이번에도 후다닥 시를 쓴 후 지각생들 사이에 몰래 껴서 과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내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여러 문창과 학우들의 시를 첨삭해주신 교수님은 거의 맨 뒤 순서에 있는 내 이름을 부르셨고 나는 앞으로 나가서 시를 읽었다.



 가끔 넌 등을 내보이며 뒤돌아 앉았고

 나는 말없이 너의 등을 긁어주었다

 언젠가 내가 등을 내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너도 말없이 내 등을 긁었다

 그러다 평생 너의 등을 긁어주겠노라고

 노란 형광등 아래서 다짐한 적이 있었다



 대충 이런 시였던 것 같다. 어쨌든 과제를 제출했다는 마음으로 안심하고 있는데, 교수님의 말씀이 조금 충격이었다.


 “아, 이 시는 굉장히 시간을 들여 쓴 작품이다!”


 혼자 킥킥거리며 웃는 내 모습을 다른 학우들은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과제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긴 했지만, 그 수업 때는 이런 식으로 꼼수 쓴 적이 많다는 것을 이제야 실토한다. 물론, 매번 저런 칭찬을 듣지는 못했지만.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런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시절, 내가 쓴 시가 생각날 때가 많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랑은 별 게 아닌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일.


 지금 나에게 등 긁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사랑은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2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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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긁어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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