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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이 Sep 03. 2023

레몬 나무가 건네준 아주 작은 자존심


 아보카도 나무에 이어 레몬 나무로 두 번째 가지치기를 시행하기로 했다. 아보카도와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심긴 레몬 나무는 내가 직접 발아시킨 아이는 아니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의 대표님께서 직접 레몬을 먹고 발아시킨 씨앗을 주셔서 그 뒤로 내가 화분에 심어 작은 나무로 일궈낸 것뿐이었다. 당시 발아된 씨앗을 여러 개 주셨었는데, 그중 작은 나무로 키워낸 몇 그루의 화분들은 대표님이나 회사 몇몇 직원들에게 나눠주었고 내 몫으로는 한 그루만 지원받을 수 있었다. 사무실 내 책상 위에 자리했던 레몬 나무는 퇴사 후 유일한 나의 전리품이 되어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다.


 레몬 나무는 날이 덥건 춥건 맹렬하게 위로만 쑥쑥 자라났다. 그런데 매번 이파리가 시들시들하고 상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 레몬 나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속으로 고민한 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 먼저 아보카도 나무에 ‘처음 가지치기’를 하고 나서 살펴보니 아보카도가 좀 더 잘 자라나는 듯 보이기에 레몬 나무도 가지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가지치기 한 아보카도 나무보다 좀 더 과감하게 레몬 나무의 긴 줄기와 이파리를 싹둑 잘라냈다. 처음엔 몰랐다. 잘린 줄기와 이파리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그러다 내 주위로 상큼한 레몬 향이 진동하기에 설마 싶어 손에 쥔 한 움큼 초록 줄기와 이파리에 코를 박았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잘린 초록 뭉치에서 새초롬하고도 상큼한 레몬 향이 풀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레몬 나무의 겉모습만 보고 잘못된 줄로만 알았는데. 이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의 존재감을 지키며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구나! 난 순식간에 깨달았다.


 가지치기가 끝난 후에도 버리려고 했던 줄기와 이파리를 모아 몇 번이나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화분에 심긴 레몬 나무의 이파리도 잡고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레몬 나무가 쑥스러워할 만큼. 여전히 진한 레몬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겉보기엔 초라해 보여도 이건 레몬만이 낼 수 있는 향이었다. 나의 아주 작은, 소중한 레몬 나무.


 생각지도 못한 상큼한 향이 꽤 감동적이었다. 최근 나는 내 맘에 쏙 들만한 결실이나 이렇다 할 동기조차 얻지 못하고 있어서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대폭 줄어든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듯 레몬 나무는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준 것이다. 자기 존재감을 뿜뿜 뽐내면서.


 레몬이 아닌 줄 알았지? 나는 레몬이야!

 레몬 나무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향을 맡던 나는 레몬 나무에 물을 흠뻑 주고 다시 햇볕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베란다에 내놓아주었다. 잘 자라지 않아도 된다고 나지막이 속삭이며. 너는 이미 레몬이니까 충분하다고. 어쩌면 크나큰 믿음이 생긴 것도 같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충분한 햇볕과 시간과 물을 잘 받아먹고 자라난 그는 어느 순간엔 그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레몬이 되어 있을 거니까. 그런 믿음이 생겼으니까.



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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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나무가 건네준 아주 작은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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