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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ding Mar 26. 2016

기억을 지워주는 가게

당신의 소중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지만...

3월 25일 24:00시 기억을 지워주는 가게에 왔다. 그녀를 만난 지 1년이나 가까운 시간이 됐고, 그녀와 헤어진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사무치는 아픔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기억을 지워주는 가게에 왔다. 그녀를 축복하며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서 스스로 찾아왔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가니 뭔지 모를 두려움과 아쉬움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가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톤 행복한 모습으로 웃는 사람들의 사진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그중에서는 익숙한 모습도 보였다. 행복한 모습의 사진을 보니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어떻게 오셨어요?" 고운 목소리가 커튼이 쳐져있는 방 안쪽에서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보고 싶었던 그녀가 방에서 나왔다. "놀라지 마세요. 저는 그녀가 아니에요. 저는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거예요" 그제야 이해를 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대화해보는 그녀였지만 어쩐지 몇 년을 함께한 사람처럼 편안했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모습을 보니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댔다. 마음을 숨기고 싶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잊고 싶다고요?"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어봤다. "네, 그녀를 잊고 싶진 않지만 그녀를 위해 잊어보려고요" 사실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고 잊기 싫은 사람을 만났기에 이 말은 거짓말이다. 그래도 긴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고 이야기했다. 최선의 선택이지만 거짓임을 알았던 그녀는 한 번 더 물어봤다. "정말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소중한 기억을 지우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쉬운 표정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다가오라고 이야기했다.


"기억을 지우면 시간이 지나 되돌리고 싶을 때 다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무거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그건 본인 몫이에요" 짧은 대답에 숨어있는 의미를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무슨 일인지 나보다 더 슬퍼하는 그녀 모습에 나는 그녀 앞에서 울 수 없었다. 슬퍼할 수 없었다. 담담한 척하며 그녀를 따라갔고 기억을 지워주는 침대에 나를 눕혔다. 그렇게 누워있는 나에게 주의점을 알려줬다. "여기서는 기억을 지워주지만 마음속 깊이 세겨진 감정을 지울 순 없어요" 그걸로 됐다. 만약 그녀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기억을 잊어도 마음으로 그녀를 기억할 수 있음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쿨하게 내려놓지 못하고 끝까지 그녀를 기억할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으니 그녀가 말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말이 끝나고 눈을 감으면 그녀를 잊게 될 거예요" 눈물을 참고 목까지 올라온 감정을 가다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앞으로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축복할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오르면 그땐 망설이지 말고 날 불러줘. 네가 힘든 일이 생기길 원하진 않지만, 그래도 언제나 너에게 달려갈 준비가 돼있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 웃는 모습으로 마주칠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살자." 눈을 감으니 나지막이 작게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오빠. 날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오빠가 아니었나 생각해. 정말 기회가 된다면 웃으면서 얼굴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오빠도 그때까지 행복하게 지내"


그 말을 듣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할 기운이 없이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눈가에는 흐르는 눈물이 느껴지고 이제야 깨달았다. 기억을 지워주는 가게는 결국 내 마음 속이고, 익숙한 모습의 행복한 얼굴로 찍혀있는 벽면의 사진들은 그녀와의 추억이고, 기억을 지워주는 가게의 주인은 나이자 그녀였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이자 마지막 연락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모두 진심이면 좋겠다. 그때까지 단 한 번일지라도 세상에서 하늘에서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 거다. 그래서 기억을 지워주는 가게를 찾아왔다.


그녀와의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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