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설거지로 써본 시

한 편의 시

by 모루


설거지로 써본 시

피지에서 피식 웃던 남자는

캥거루처럼 다 큰 두 아들을 양육합니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며 자연을 즐기던 남자는

설거지에 요리를 하기 위해 아내보다 먼저 퇴근합니다

지칠 줄 모르던 남자는 설거지 앞에서 지치고

생각이 번쩍이던 남자는 풍선처럼 펑하고 꺼집니다

멋진 트레킹을 상상하며 도시를 돌고

더위와 장마에 지칠 법도 한데 지칠 수 없는 남자는

쓰러질 곳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참고

멋진 기획서를 구상하며 울음을 참아냅니다

사실 울 곳도 마땅치 않아 계곡을 찾는 남자는

세수하는 척하며 소리 내어 폭포처럼 울어댑니다

재주가 많던 남자는 재수 없는 일이 많아지면서

가끔 저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합니다

그리곤 대뜸 설거지로 꼭 시를 써보라고 권하네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