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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코 이야기

에세이 한 꼭지

by 모루

매니저들의 작은 소동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던 해에 서울은 활기가 넘쳤다. 당시에 새롭게 부상하던 동네는 압구정동이었고 그 동네 중심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파르코란 패션 빌딩이 복합문화센터란 이름으로 오픈한 지 1년이 지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파르코 건물의 1층 입구를 통과하여 가장 구석진 공간에 커피은행이라는 고급 커피숍이 있었다.


카운터에는 우리가 누나라고 부르던 매니저가 정갈한 스웨터를 걸치고 수다스럽지 않은 차분함으로 매장의 분위기를 이끌었고, 바로 옆 매장 이조떡집 아저씨는 성경책보다 더 두꺼운 역사소설책을 펼친 채 서서 손님을 기다리며 두꺼운 안경테너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커피숍 맞은편 옷가게에는 결혼한 지 2년이 넘게 임신이 안되어 늘 출근하면서 한약을 중탕하러 맡기던 늘씬한 점원 누나가 수줍은 몸짓으로 약을 올려놓고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던 뒷모습이 보였다.


매장을 오픈하여 오전 11시 이전에는 재료준비와 밀린 설거지, 매장 청소가 완료되어 여유가 생기면, 원두를 갈아서 내린 첫 커피는 늘 누나에게 가져가 시음하는 일종의 루틴도 있었다.

당시에 빨간 마티즈를 몰던 매니저 누나가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장마철, 갑자기 카운터를 비우고는 차를 몰고 목적 없이 길을 나섰고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앞이 안 보이자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는 소나기처럼 펑펑 울었다고 돌아와 뒷얘기를 들려주며 눈이 부은 두 눈을 증거로 내보였다. 아마 그 무렵, 심하게 내리붓는 소나기를 보러 뒷 출구로 나가려던 내 눈에 늘씬한 점원 누나의 흐느끼는 뒷모습이 들어온 것도.

두 매니저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맞닥뜨린 성난 자연 앞에 기구한 그들의 운명을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해소하였고 그 작은 소동은 수십 년이 지난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서 소나기 내리는 장마철이면 문득 생각이 나곤 한다.


독신이라고 주장하던 매니저 누나는 늦게나마 결혼했을까, 한약을 먹던 늘씬한 매니저 누나는 임신에 성공했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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