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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May 24. 2023

필리핀 가정에서의 한 달 이야기, 영화 속 홈파티가다

홈스테이로 시작한 첫 해외생활

캐나다로 출국하기 전, 한국에서 좋은 숙소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취라고 하기엔 애매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나는 요리경험은 제로였다.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라면, 계란후라이, 김치볶음밥이 전부였다.

집에서도 밥을 잘 챙겨 먹지 않는 나였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집에 국과 밑반찬을 항상 구비해 두었는데, 그것 조차 데워먹기 귀찮아하는 나였다. 그렇기에 더욱 초반에는 '홈스테이'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에는 '홈스테이' 보다는 룸쉐어, 룸렌트로 방을 구한다. 그게 더 편하고, 저렴하고, 방도 구하기 쉽다. 인터넷 카페에서도 내 나이면 홈스테이보다는 룸렌트, 룸쉐어를 추천해주었지만, 나는 내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다. 내가 홈스테이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고선 다른 방법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 할 수 있는데 까지 홈스테이를 알아보자라고 마음먹고는 홈스테이를 알아봤던 거 같다.

출국 한 달 전, 운이 좋게 사촌동생 직장동료의 집에 방 한 칸이 남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내가 짧게 살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집에서 머물기로 정했다.


나의 필리핀맘, 필리핀 대디. Gail과 Darius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부모님과 연배가 비슷했고, 그들의 자녀들도 나와 또래였다. 큰 아들이 개인 집을 구해 나가면서 방이 한 자리가 남았고 그 방을 나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는 작은 아들과 화장실을 쉐어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사실 그런 부분은 상관없었다. 첫 한 달은 아직 계획된 일정이 없으니, 일을 하고 있는 작은 아들의 시간을 피해 내가 화장실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룸렌트를 하여 살고 있던 Darius 의 절친 가족들이 사정상 필리핀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방, 화장실, 부엌까지 독립된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룸렌트 공간의 비용은 달랐지만 첫 한 달은 그대로 내고 사용하기로 했다. (그 다음달부터는 사정상 이사를 갔지만 말이다. )


내가 생활한 집은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대중교통을 주로 이동하는 나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 도 있는 위치였다. 항상 도시에서만 생활하고 한국에서도 역세권에서 살아왔던 '나'이기에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건 사실이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 좋았다. 처음에는 가로등도 거의 없는 데다가 겨울엔 6시만 지나도 깜깜해져서 무서웠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평화로운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나 생각보다 편의시설이 없어도 굉장히 잘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자연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밴쿠버에 오면 다운타운 근처에 집을 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그런 도심 속 보다 주택가라는 사실에 더 좋았다.

Gail 과 Darius 와 함께 생활하며 다른 문화권 가정에서의 홈스테이는 어땠는지에 대해 풀어가 보려 한다.

우선, 홈스테이라는 것 자체가 한 가정에서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다 보니 그 가정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듣기로는 취침시간이나 샤워시간도 정해져 있는 곳도 많다고 들었다. 내가 생활한 곳은 그런 건 없었다.

그저 빨래는 주말에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과 외식이나 밥을 안 먹게 된다거나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안 들어올 경우 미리 연락을 줬어야 했다. 주말의 경우, Gail 은 요리를 하지 않았기에 밥을 먹을 땐 알려줬어야 했다. 이 부분만 생각하면 말이 홈스테이였지 밥 챙겨주는 룸렌트나 다름없었다.

다음은 제일 중요한 부분이지만 한국에서 구했을 땐 가늠할 수 없는 '사람'에 관한 부분이다. 나의 경우 이 부분은 어느 정도 보장된 곳이었긴 했다. 사촌동생의 직장동료지만 평소에도 자주 놀러 다닐 만큼 친한 사이였고,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홈스테이를 고집했던 또 다른 이유는 '영어'였다. 조금이라도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가고 싶었다. 홈스테이 가정마다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실제로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는 가정도 많다고 한다. 사실 나의 경우에도 집 안에서는 크게 영어를 쓸 일이 많이 없었다. 저녁 시간엔 가끔 같이 먹어서 영어를 사용했지만 그 외 시간에는 나도 밖에 나갔고 다들 각자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간단한 영어조차 잘 나오지 않는 '나'를 보면서 홈스테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혼자 생활했다면, 그 간단한 영어가 잘 안 나오는 상태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한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부분이 많고 행복한 시간의 홈스테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정과 함께 사는 것이기에 불편한 부분도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식사'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선, Gail은 굉장히 밥을 잘 차려주는 편이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김치도 구비해 두었다. 가끔 외식하는 날이면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함께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굉장히 규칙적인 사람이었고, 채소가 중요한 사람이었나 보다. 한국에서 평소 군것질을 좋아하고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Gail과 Darius는 굉장한 고기러버였다. 물론 나도 고기 좋아한다. 고기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필리핀에 여행이라도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필리핀 음식은 맛있지만 굉장히 짜고 굉장히 달다.

첫 일주일은 맛있었고 너무 좋았지만 채소 없는 양념된 고기와 밥을 항상 9시가 다될 즈음에 먹으려고 하니 생각보다 나는 좀 힘들었나 보다. 가끔 사과를 사줬는데, 그게 그렇게 반가웠다. 그리고 한국라면을 가끔 아침 먹으라고 구비해 뒀었는데 라면을 먹는 날이면 정말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국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매운 것을 잘 못 먹고, 한국에 있을 때 김치도 막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생활할 때는 매일 김치를 꺼내 먹었다. 김치만이 유일한 아삭한 채소였기 때문이다. 김치를 구비해 준 Darius에게 너무 감사하다.


홈스테이 하는 동안 정말 감사하게도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홈파티'에 대한 부분이었다. 하루는 Gail과 Darius의 절친의 딸의 생일이라고 해서, 생일파티에 가지 않겠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만 28년 한국에서 살아온 나, 절친 딸의 생일 파티에 '나'도 간다고? 가도 되는 자리인가?

사실 이해가 안 갔다. 한국에서 눈치껏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던 나에겐 괜히 눈치 없게 행동하는 건 아닌가 하는 무거운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어차피 내가 먼저 간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Yes를 질렀다. 그리고 나는 처음에 레스토랑에 가는 줄 알았다. 도착한 곳은 어느 한 집. 그렇게 집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해봐야 고작 10명 남짓 있을 것 같았던 내 예상을 뒤엎고, 10명은 무슨 20명도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집 안에서 우리를 반겨줬다. 영화에서만 보던 그런 홈파티였던 것이다. 이런 줄 알았으면, 화장이라도 하고 올걸..

캐나다에 오고 너무 후줄근하게만 다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20살이 된다고 했던 Gail의 절친의 딸.

20살 또래로 보이는 딸 친구들. 10명은 넘어 보였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에 노래를 틀고 한참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이 있는 공간. 앉을자리가 없이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Gail의 친구 부부 3 커플과 그들의 자녀들도 다 있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말 정신이 없었지만 흥미로운 광경이었고, 나는 영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끝없이 사람들이 왔다. Gail과 Darius의 두 아들도 도착했다. 12시쯤 다 같이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고, 그쯤 30명이 족히 넘는 약 4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던 거 같다. 나는 다음날 출근하는 Gail의 작은 아들 덕분에 1시쯤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니면 나도 3시는 넘어서 집에 돌아올 뻔했다.

여기서는 그냥 다들 친구였다. 친구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친구의 사촌도, 모두가 생일을 축하해 주는 자리였고 이 즐거운 자리를 함께하기 위해 모였다.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이런 자리를 즐기기가 어려운 환경이다. 우선, 아파트가 많은 나라이기에 층간소음 때문이다. 그리고 예의를 중요시하는 나라이기에 어른과 술을 그렇게 자유롭게 마시며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럴 것 같다. 어느 문화가 더 좋고 나쁘고 할 건 없다. 그저 서로가 다를 뿐이고, 나는 이런 문화를 TV 에서가 아닌, 실제로 보고 함께 경험했을 땐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저 새로운 경험을 했음에 너무 즐거웠고, 영화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내 인생에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순간이었다. 1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며 매일 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서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었다. 정말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짧고 소중했던 한 달의 시간은 지나갔다. 나는 캐나다에서 생활을 하면서 홈스테이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 좋은 곳도 있고, 반면에 아닌 곳도 존재하는 것 같다.

숙소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잠을 못 잔다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 좋아서 1년 더 연장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건 다 좋았지만 같은 언어권 사람이라 '영어'가 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영어를 더 사용하는 환경에 가고 싶어 이사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룸메이트가 별로라서, 또는 룸메이트가 없어서 그게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전 Gail은 다른 홈스테이 하는 친구들이 없어서 심심하지 않겠냐고 물어봤지만, 사실 나의 경우 상관없었다. 사실 홈스테이의 경우 집주인과의 컨택이 많이 없어도 함께 홈스테이 하는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 하면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그런 부분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경우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정말 좋은 시간이었고, 이만한 집이 없다는 걸 알지만 나의 사정으로 인해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지금은 첫 해외생활의 시작을 함께한 곳이 여기라서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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