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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May 16. 2023

눈 깜짝할 새 다가온 출국

익숙했던 한국에서의 생활, 잠시만 안녕

2022년 4월 퇴사를 하고, 5월 캐나다 가기 위한 서류준비를 하고, 6월부터는 프리랜서활동을 한 발짝씩 시작을 했다. 그리고 8월부터는 영어스피킹 공부를 위해 주기적으로 스터디를 다니기 시작했고, 9월부터는 좋은 기회가 다가와 제로웨이스트 동아리 강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다가온 10월부터는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다. 국제아로마테라피시험도 응시했고, 캐나다행 비행기표도 결제했다. 11월엔 동구청에서 제로웨이스트 강사로 강의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12월이 되면서 내 프리랜서 활동 스케줄은 하나씩 마무리가 되어갔다. 

12월이 되면서 우스이레이키 어튠먼트를 받고 레이키프랙티셔너가 되었다. 그리고 1월엔 필라테스 매트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이어 12월과 1월엔 나의 소중한 인연들과 인사를 하며 정신없이 보냈다. 

눈으로 보여지는 건 없었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쌓아가며 새로운 일상들을 보내온 2022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캐나다 가기로 '확신'이 들 때쯤, 타이밍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았는진 모르겠지만 '캐나다'에서 생활 중인 사촌동생이 휴가차 한국에 들어왔다. 약 1달간 한국에 있다가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사촌동생이 오래전부터 캐나다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촌동생이 캐나다에 있다고 해서 '캐나다'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를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지 혼자 해야 한다 생각했고, 받으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더 주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신세 지는 건 싫었다. 그렇기에 처음엔 사촌동생에게도 알리지 말까 생각했다. 동생에게 신세 지는 거라 생각했던 것이고, 동생에게 짐이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 해야 한다는 나의 억지스러운 고집이 뭐길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남도 아니고 가족이다. 사촌동생과 충분히 상담해도 되는 부분이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한다면 당연히 나도 동생을 도와줄 것이고,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촌동생과 밥을 먹을 때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에 간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렸다. 

동생은 너무 기뻐하며 언니 너무 대단하다며 나는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까지 알려주었다. 나는 캐나다에 가야지라고만 생각했지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 캐나다의 시스템들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동생을 통해 들을 수 있었고, 나아가 동생이 캐나다에서 자리 잡은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자리 잡는 동안 동생은 캐나다에서 자리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그 경험이 쌓여 있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이런 친구와 사촌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었고 언제든지 동생한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동생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이야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게 좋아? 비가 많이 오는 게 좋아?

2. 자연이 좋아? 도시가 좋아?


이 두 질문에서 나는 다 '밴쿠버'를 골랐다.  조금의 여지는 남겨주었지만 사실상 '밴쿠버'행이 결정됐었다. 다른 작은 소도시도 있지만, 영어를 못 하는 내 입장에서는 처음 가는 것이니만큼 '대도시'를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론토와 밴쿠버 중에 고민 중이었고, 밴쿠버와 토론도 둘 다 생활해 봤던 동생입장에서 저 두 질문에서 답을 해보면 결정하기 수월할 거라 했다.

한국으로 치면 토론토는 서울의 느낌에 가깝고 눈이 많이 온다고 했다. 그리고 밴쿠버는 비가 많이 오고 부산느낌이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맛집, 술집 그런 도시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밴쿠버에 왔을 땐 지루함을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했고, 반대로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만 나가도 자연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삶인 밴쿠버를 선호한다고 했다.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나는 추위가 너무 싫었고, '눈'보다는 '비'였다. 그랬기에 밴쿠버를 선택했다. 


그렇게 밴쿠버행을 결정하고 출국하기 3개월 전인 11월에는 비행기 티켓도 결제할 수 있었다.

11월 중순부터는 천천히 집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홈스테이'로 살아야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다른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었고, 나는 요리를 못 하는 사람이었기에 낯선 땅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끼니를 제때 못 챙겨 먹을 거라 생각했다. 어학원에 대한 계획은 열어두고 있었지만 확정은 아니었기에 조금이라도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외국인이 운영하는 홈스테이 집으로 가자고 생각했고, 스스로 구하는 것이기에 오래전부터 여유롭게 알아보았다. 홈페이지와 메일로만 주고받는 것이기에 사실 답장은 잘 오지 않았고, 오더라도 성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홈스테이 집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사촌동생이 말해주길 나의 경우 나이도 꽤 있었고, 오래 살길 원하지 않았기에 더 구하기가 어려울 거라 했다. 정 안 구해진다면 본인 코워커가 하는 집 물어보고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계속 구했다. 혼자 구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한 집과 연락이 닿고 최종결정할 타이밍쯤,  우연히 동생의 코워커집에서 세 달 정도 홈스테이가 가능하다고 했고 나는 고민 없이 동생 코워커 집에서 홈스테이 하기로 했다. 이때가 1월이었다. 11월 중순부터 구하기 시작했는데 1월에 집이 구해지다니, 출국하기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12월 내 프리랜서 활동을 마무리하고 동시에 레이키 어튠먼트를 받았고, 1월에는 이어서 필라테스 매트과정도 수료했다. 12월부터는 나의 소중한 인연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정신없이 지내기도 했다. 

너무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가 내 면역력이 약해졌을까? 아빠가 걸려서 나도 함께 걸렸던 것일까?

병원에서 근무할 때도 끝까지 혼자 살아남았던 내가 1월 출국하기 3주 전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일주일간 격리가 이어졌고 내 모든 일정은 스탑이 되었다. 정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쯤 휴식을 취하라는 하늘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정말 푹 잘 쉬었던 거 같다. 다행히 목만 조금 쉬고 하루 조금 피곤했을 뿐, 거의 무증상이었다. 입맛이 없어진다는 말도 있었는데, 정반대로 모든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이것저것 다 시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일주일만 더 늦게 걸렸어도 출국이 미뤄졌어야 했다.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푹 쉬고, 내 소중했던 인연들과 인사하며 마무리 지었다. 내가 가는 이 무모한 길에 모두가 응원해 주고 지지해주고 있었다. 모두에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사실 환전을 할 때도, 짐을 정리할 때도, 친구들과 인사할 때도 실감이 안 났다.


출국 날, 부산 서면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 오를 때 마중 나온 친구와 아버지와 인사를 하며 그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당연했던 일상들, 내 친구들, 내 가족들 이제는 그 당연했던 것들이 이젠 내 곁에 없는 것이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수시로 왠지 모를 감정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실컷 운 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가 꿈꿔왔던 그 생활을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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