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이로 29살, 나는 빠른 생일이다. 그렇기에 13학번으로 대학교 입학을 했고, 한국에서는 1년 빠르게 생활을 해서 친구들은 30살이다. 대학 입학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주변 지인들은 직장에서 자리 잡고, 결혼하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요즘 시대가 시대인지라 다들 늦게 결혼한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주변에는 결혼하는 친구들이 많다. 2021년부터 시작해 2022년, 23년 결혼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시기에 나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밴쿠버로 떠나왔다.
다들 용감하다 했고, 용기가 부럽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도 내가 부러워요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그리고 현재, 캐나다 생활한 지 111일 차를 넘어가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보다 걱정이 많던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빡빡하게 살았던 내가,
나만의 기준을 두며 그 틀 안에 가두고 살았던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직장 다 버려두고 가족들 친구들이 없는 타지 캐나다로 올 수 있었을까?'
정신없이 진행됐고, 뭔가에 이끌려 당연히 이루어졌던 부분이었기에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시기엔 이 변화도 자연스럽게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큰 변화들이다.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나였다.
'손실'과 '잃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나였다. 쥐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하는 나였다.
'변화'를 바라고 있었지만 결국 '잃는 것'이 두려워 '안정'을 택하던 나였다.
그리고 그 삶은 나쁘지 않았다.
내 통장엔 조금씩 돈이 쌓이고 있었고, 시간을 내서 자기계발도 하고 있었다. 매 년 할 수 있는 것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내 가족, 내 친구들은 항상 곁에 있었다.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들도 말이 직장동료지 '친구'였다. 언제든 원하는 날이면 친구들과 술 한잔, 밥 한 끼, 카페 가서 커피 한잔 할 수 있었다. 그게 그 시절 행복이었다. 나는 '변화'를 원해 '자기계발'을 하지만 결정적인 무엇인가 하지 못해 결국, '안정'적인 삶을 택하는 그 중간 어디선가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21년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한 것 또한, 변화를 바라지만 안정을 놓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퇴사를 위해 하나의 '보험'이 필요했던 것이니 말이다.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결정하던 때와 공인중개사 시험'결과'가 나왔을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치기 전, 나는 어떤 시험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렇다. 그리고 8개월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적어도 나에겐 길었다. 그 긴 기간 동안 한 시험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 본 경험은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결과, '불합격'이 맞을까 봐 그게 더 두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8개월 간 '동차'를 준비한다고 하면 힘들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사실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힘들어도 동차를 준비한다고 했다. 이때는 8개월이라는 기간이 애매했다.
1차를 하기엔 긴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또, 1차만 준비했다가 1차에 '불합격' 할까 봐 그게 더 두려웠던 거 같다. 동차에 준비했는데 '불합격' 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니까, 나도 떨어질 수 있다.라는 그런 보호막 같은 거였다. 그저 2년 준비하는 건, 기간이 길어서 싫다 라는 건 '1차 시험에 대한 실패'가 두려워서 둘러대기 좋은 핑계였다.
그리고 시험을 준비할수록 내가 이렇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도 이렇게 노력해 본 적도 없었고 그저 '실패'가 두려워, '실패'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적당히' 하고 그 '적당히'의 보호막 아래 살았던 거 같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시험이었다. 여태 '공부'라는 것을 열심히 해본 적 없었던 '나'로써는 처음으로 치열하게 공부해 본 한 해였다. 그리고 공인중개사시험결과가 나왔을 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이상하게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내가 열심히 했다는 사실과 나의 성장을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게 너무 좋았다.
공인중개사시험은 불합격이었지만 나는 시험의 합격보다 더 큰 걸 얻을 수 있는 시험이었다.
이건 시험 준비 할 때, 중개사법 책에 쓰여있던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며 지금처럼 '영어' 공부도 한다면 나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실패'가 두려워서,
'시선'이 두려워서,
나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의 보호막 아래 살아갔다면,
공인중개사 시험도 아쉬웠을 것이고
퇴사도 아직 하지 못했을 것이며
영어는 시작해도 또 같은 길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매 순간 최선을 다 하며 살아가려 한다.
'실패'보다는 '아쉬움'이 더 싫어졌다.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기기 싫어서 밴쿠버로 왔다. 내 인생이 길진 않았지만 평생의 꿈이고 동경이었던 거 같다. 그저 다른 사람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해외, 이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친구가 아모카가 그랬다 살아가면서 생각만 해도 설레는 것이 있다는 건 너무 소중하고 좋은 일이라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그 설렘을 내 인생에 그리기 위해 캐나다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매일, 매번 영어 말하기와 듣기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실패'의 과정을 즐기려 노력한다. 그리고 '실패'를 경험하고 도전한 나에게 칭찬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