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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Mar 25. 2021

나무는 꿈을 자르지 않는다

 어떤 나무를 보면 꼭 사람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나무가 있습니다. 독일가문비 나무는 곧게 쭉 뻗은 수형이 슈트 입은 북유럽의 남자 같고, 종려나무는 마르고 키 큰 여자 같아 보입니다. 마을 앞의 오래된 팽나무나 느티나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보입니다.

 봄이 되면서 앞다퉈 꽃을 피우고 새싹을 틔운 나무가 많아졌습니다. 한때 꽃들은 순서대로 피었습니다. 지금은 온난화로 인해 동시에 피어나 마치 꽃박람회처럼 온갖 꽃들을 보지만 예전엔 매화, 산수유를 감상하고 나면 백목련이 뒤를 잇고 그다음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적어도 지는 꽃과 피는 꽃의 사이에 틈이 있어서 져버린 꽃의 아쉬움을 피어나는 꽃으로 달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화원의 꽃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매화도 보이고 진달래나 목련을 보기도 합니다. 


 벚꽃도 막 피기 시작했습니다. 예전보다 조금 이른 편입니다. 벚나무는 주로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고 꽃그늘을 만드는 오래된 수령의 벚나무길은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벚나무의 기둥은 검고 울퉁불퉁하거나 조금씩 휘어져 있습니다. 어린 나무일 때는 미끈하고 곧아 보이던 기둥입니다. 시간의 흔적은 이런 것일까요. 마치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거무티티한 색상과 옹이 박힌듯한 거친 수피, 잔털처럼 자리 잡은 푸른 이끼는 질곡의 역사 같아 보입니다. 오래된 벚나무를 보면 숭고함을 느낀다고 할까요. 낡고 오래되고 허름해 보이는 나뭇가지 위로 쏟아질 듯 피어난 꽃 무더기는 그래서 더 장엄해 보입니다.

 꽃이 질 때도 아름답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벚꽃은 눈 같기도, 나비가 무리 지어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나무의 정령이 보내는 진혼무처럼 긴 자락을 펄럭이기도 하고 바닥에 웅크리기도 합니다. 벚꽃은 필 때도 질 때도 드라마 같습니다. 탐스런 꽃송이로 순식간에 피어나서 화려한 결말을 보일 것 같은 주인공은 출생의  비밀이 있었고 바람은 주인공의 회오리치는 심정을 대변하듯 꽃비를 뿌립니다. 미련과 무상함이 교차하는 꽃그늘을 걷다 보면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에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고 이 드라마의 '시즌'이 끝났음을 알게 됩니다. 한순간 피었다 일제히 막을 내리는 꽃의 감옥은 벚꽃의 드라마입니다.


 요맘때 새싹을 틔운 나무 중 단연 최고는 수양버들입니다. 강가나 천변에 연둣빛으로 곱게 채색된 버드나무는 홀로 있어도 돋보입니다. 이제 막 염색을 하고 미용실을 나온 사람처럼 경쾌하고 자신 있어 보입니다. 버드나무의 가지는 밑으로 처져있어서, 늘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어서 운치가 있습니다. 왠지 그 곁에는 정자나 벤치 하나쯤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중에는 버드나무 껍질의 천연 진통제 성분을 알고 나일강변에 심게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청랭한 공기를 내어줄 것 같은 버드나무의 줄기는 떨어져서 봐야 싱그럽습니다. 가는 실 같은 연두색 줄기는 밑으로 처질만큼 자라지 않았고 아직은 드문드문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흔들림 때문에, 연두색의 확장으로 실제보다 번져 보입니다. 이제 막 물감을 푼 것 같은 선명한 버드나무 색상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입니다. 머리를 빗겨 넘기려는 버드나무의 손짓을 벚꽃 사이로 본다면 머릿속의 고통 하나쯤은 쉽게 진정될지 모릅니다.

 길가의 가로수를 자르고 있습니다. 나무가 베어질 때마다 생각합니다. 누구의 요구에 의해 집행된 것인지, 어떤 권리로 자르는 것인지, 어디까지 자르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한 번도 묻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댕강 댕강 잘려나간 나무는 수종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한때  커다란 잎을 가졌던 플라타너스도 은행나무도 몽당연필처럼 초라해집니다. 도로정비라는 이유로 혹은 정돈이라는 이유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고속도로변에 높게 자라던 메타세쿼이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다 보니 나무의 절반이 잘려 나가서 누군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메타세쿼이아라고 상상할 수없게 변해버렸습니다. 메타세쿼이아는 높이 자라는 나무입니다. 오벨리스크처럼 높게 자라는 나무의 허리를 댕강 잘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나무도 환상통을 느낀다면 허리가 잘린 나무는 얼마나 아팠을까요. 모든 나무는 고유의 수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무는 자라면서 하늘을 보고 매일 손을 뻗어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할지도 모릅니다. 매일매일 자라나는 나무의 꿈은 열려있는 하늘입니다. 그런 나무의 꿈을 인간의 머리로 재단하고 잘라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가진 꿈의 크기를 제한합니다. 어린 시절 밤하늘 별처럼 많았던 꿈. 그러나 나이 들 수록 점점 작아져 버린, 그래서 끝내 쏟아져 내린 별빛 속에서 스스로 자멸해버린 외로운 꿈. 인간의 꿈은 단념하고 포기하면서 점점 쓸쓸해지나 봅니다.

 어쩌면 나무는 목표를 따로 정하지 않기에 계속 자랄지도 모릅니다. 목표를 한정하지 않은 나무의 꿈은 늙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래된 나무를 늙은 나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 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계의 기온은 내 체온보다 낮았지만 나무는 꿈을 향해 높은 곳으로 손을 뻗습니다. 

 봄의 어느 날, 나무가 꿈을 꾸고 새들이 바람과 함께 희망을 노래합니다. 어디든 열려있는 곳으로, 머물 수 있는 곳에서 꿈은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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