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어릴 때도 교정의 큰 나무를 보면 든든하고 마음이 편안했다.
호랑 가시나무를 가게에서 키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퍼펙트 데이즈`란 영화 때문이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산책길이나 골프장의 울타리 주변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순천만 정원 남쪽 울타리에서 콩나물 보다 조금 더 자란 풍뎅이 딱지날개 같은 잎을 달고 있는 호랑가시나무를 발견했다. 같이 자라는 풀들 사이에서 제법 여문 잎을 두 장 내보이고 있었다. 손삽을 꺼내 머그컵크기의 화분에 옮겨 심었다.
햇볕이 드는 가게 입구에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봤다. 옮겨 심고 며칠 지나자 새싹이 돋아났다. 신기했다. 원래 있던 잎보다 크게 자랐다. 며칠 사이에 자라난 연둣빛 잎이 점점 짙어지는 걸 보며 새싹이 계속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경이로움은 계속되지 않았다. 새로운 싹을 한 번 보여준 후 호랑가시나무는 침묵했다.
그 후로 비슷한 경로로 다양한 나무 모종을 이식했다. 단풍나무, 벚나무, 사시나무까지 점점 늘어났다. 모두 실내에서 키우기는 힘든 종이라 가게와 가게 사이에 화분을 내놓고 환경에 적응하도록 놔뒀다.
단풍나무는 분재로도 키울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실내에 있는 시클라멘 옆자리에 두면서 감상했다. 단풍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화분에 둔 것에 불과했는데 마치 큰 나무처럼 느껴졌다. 슬쩍 휘어진 나무의 곡선이 긴 시간을 헤쳐온 것처럼 느껴지고 대여섯 장 달린 작은 단풍잎은 넓은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내가 개미처럼 작아져서 나무밑에 앉아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별모양의 작은 이파리를 달고 있는 단풍나무에게 나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풍식이`는 제일 튼실하고 고집스럽게 굽은 등을 가졌다. 항상 옆자리를 지키는 여리한 이는`단수니`라고 지었다. 깜찍한 이파리가 반짝이는 아이는`별이`라고 네임택을 붙였다.
벚나무는 빨리 자랐다. 사시나무도 못지않았지만 벚나무의 맹아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데려오고 얼마 되지 않아 매일 새싹이 돋았다. 마치 성장기의 아이처럼 매일 컸다. 초본류처럼 약하던 가지가 단단해지고, 비가 오면 숨죽인 듯 젖어있다가 햇볕과 함께 싹을 틔우며 키가 자랐다. 나무젓가락 크기였던 그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화분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올 가을이나 내년 봄쯤에 야생으로 돌려보내야겠지만 성장하는 나무를 보면서 생명의 귀함을 느낀다. 이식한 나무는 대부분 살았지만 나의 불찰로 죽은 것들도 있다. 물을 너무 많이 주었거나 환기나 햇빛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나무를 좋아해 곁에서 보고 싶었던 나의 욕심 때문이다. 원래 자라던 곳에 두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불상사였으리라.
농부가 작물을 키우며 관찰하듯이 나무를 돌보며 조응하는 법을 배운다. 호랑가시나무와 단풍나무는 성장을 멈추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흙의 표면을 만져보고 물을 줄지 말지 생각한다. 이제 이런 시간이 내겐 소중하다. 하루에 한 번은 그들을 보고 말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셈이다.
도로가에 있는 벚나무나 단풍나무를 볼 때가 있다. 단풍나무도 크게 자라는 경우도 있지만 벚나무는 20m까지도 자란다. 지금 내가 키우는 반려식물들은 모종에 불과하지만 묘목의 조건이 되면 토양 좋은 곳으로 보내야 한다.
올봄에 도쿄에 갔을 때 메이지 신궁에 들렀다. 그곳에서 나무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마치 고층 빌딩처럼 높게 자란 나무 숲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럽고 질투 나는 시간이었다. 토양과 기후가 다르고 역사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그런 숲을 가지지 못했고 나무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던 것 같다. 일본이나 유럽 여행 중 보게 되는 가로수는 적어도 우리와는 달랐다. 우리처럼 사람 손에 의해 무참하고 야멸차게 잘린 나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계절이 바뀌면 어떤 명목인지 모르게 잘려나간 가로수가 비일비재하고, 수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도하게 잘린 나무도 많다. 키를 자랑하며 높이 자라는 메타세쿼이아는 절반이 잘려나갔거나, 가지의 굽은 곡선미를 뽐내는 배롱나무가 기둥만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다는 것은 오로지 군림하고 지배하며 포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관리와 감독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왜냐면 하위를 관장하는 어떤 동식물군이 사라지는 순간 먹이사슬의 체계도 붕괴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화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식물은 인류보다 훨씬 오래된 지구의 주인이다. 인류 출현 훨씬 전부터 식물은 지구의 주인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면서 동물이 살아갈 환경을 조성해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동물은 식물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라도 인류가 그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
8월에도 더위는 계속된다. 오늘은 비가 내리고 나의 벚나무와 사시나무는 젖고 있다. 사시나무잎의 뒤편은 색깔이 다르고 어린잎에는 솜털이 있다. 가을은 멀었지만 찬바람이 불면 솜털은 어찌 될까. 먼지 묻은 거미줄처럼 뿌연 솜털. 계절은 바뀌겠지만 나의 사색과 관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