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Oct 16. 2020

바로 지금 사랑한다 말해줘요

사랑한다면 하루 세 번, "사랑한다" 말해달라고 하진 않지만 여하튼 그런 말을 자주 해 달라는 아내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Fomapan b/w 100 film

2018년 4월




부모님께도 자주 전화드려야지

카메라/필름 불명

1980년대 초 제주에서, 내가 태어나기 전





 요즘처럼 서늘한 바람이 두 뺨을 스치는 계절이 되면 생각난다. 언제나 그리웁던 따스한 삼립 호빵은 아니고, 취업준비생이던 무렵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때의 일이다.


 대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려면 사회봉사 관련 학점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했다. 예전의 나는 왜 불과 몇 년 뒤에 닥칠 재수강의 수렁을 예상하지 못하고서 탱자탱자 놀기만 했을까, 고학번이라 취업 준비하기도 바빠 죽겠구먼 뭐 이런 것까지 해야 되나. 토익 듣기 평가 mp3 파일을 틀어놓은 채 구시렁거리면서 집 근처의 복지시설을 검색했다. 눈에 띄던 곳은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데 위치한 구로의 어느 노인복지센터였다. 경증 치매 및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주간에 보살펴드리는 곳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저기... 그, 안녕하세요. 수강 신청해서 왔는데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설명 듣고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다음날 찾아간 그곳에서 복지사님들과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고서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적응 기간 따위의 한가로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선 아침 일찍 봉고차로 모셔 온 어르신들께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시게 한다. 출석이 완료되면 다 함께 가벼운 준비운동을 한 뒤 오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한글 교실, 국악 한마당, 원예 공작 치료 등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실 만한 내용으로 구성돼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점심 배식을 해 드리고, 식사가 끝난 뒤엔 드디어 찾아오는 잠깐의 평화로운 낮잠 시간. 오후에는 오전과 비슷한 프로그램을 한 번 더 진행하고 저녁 무렵 다시 봉고차에 태워서 집에 모셔다 드리면 하루 일과가 끝났다. 짧지만 긴 하루였다.


 친할머니께도 살갑게 굴지 못했던지라 처음 뵙는 낯선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쉽지 않았다. 눈은 그대로인데 양 입꼬리만 올라가는 억지 미소를 띠거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글자 쓰기나 퍼즐 맞추기를 상냥한 사람인 양 도와드리고, "맛있게 드세요."라고 웃으면서 배식을 해 드리는데, 어째 하는 것마다 죄다 어설프고 쭈뼛거리게 던지. 나만 어색한 건 아니었다. 처음 두 달은 어르신들도 굳게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셨다. 내가 말을 걸었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감무소식이고, 곁에 있어도 아는 척을 하시는 둥 마시는 둥,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으레 하는 뽀뽀뽀, 아니, 인사치레도 하나 없으셨다. 이곳의 어르신들이 유달리 퉁명스러우신 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훗날에야 이유를 알게 됐다.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찾아오는 대학생들은 학점 때문에 마지못해 나오는 이들이 대부분. 그러니 두어 달 후에 학기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기 일쑤였단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인사하고 웃고 떠들고 같이 자기까지 했는데, 마지막 하루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는 아이들이라니. 미치 친손주처럼 대했음에도. 그런 일을 몇 차례 겪고 나니 어르신들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쉽사리 정을 붙이기가 어려우실 수밖에. 쉽게 정을  마음은 작은 상처라도 큰 생채기로 남기 쉬운 법이니까 그럴 만도 .


 나도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점 때문에 억지로 나갔던 복지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업과 취업 준비와, 무려 연애할 시간까지 제쳐가며 하루가 멀다 하고 그곳을 찾아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고향집에 계신 나의 할머니 생각이 나서였을까, 날씨가 추워지니 사람 간의 따뜻한 정이 그리워져서였을까, 천성이 모질지 못해 한 번 맺은 인연을 칼로 무 자르듯 싹둑 끊어내질 못해서였을까. 어쩌면 몇 차례의 취업 실패로 인해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줬던 곳이 여기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매일같이 찾아간 보람있었다. 몇 달이 지나니 어르신들께서 조금씩 마음을 여시는 게 느껴졌다. "잘생긴 총각 왔네." 하면서 반겨 주시기도 하고 떠날 땐 사탕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손에 쥐어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종종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살갑게 장난치던 어르신이셨는데 그놈의 몹쓸 치매라는 병 때문에 오늘은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어하시는 거다. 한참이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고는 "그런데, 대체 누구세요?"라는데 이것 참 뭐라 대답해야 하나. 희극인지 비극인지 헛갈리는 장면이었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계신 분들이셨다. 그래서인지 매 순간 속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셨다. 이 나이에 숨기고 가릴 게 뭐가 있어, 라는 삶의 태도였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맛있으면 맛있다. 맛없으면 우웩이다. 예쁜 건 예쁘다. 싫다, 못생겼으니까. 하지만 넌 좋다. 그럼 저는 잘생긴 건가요? 아니, 못생겼는데 그래도 좋아. 아, 그게 뭐예요. 말씀하시는 내용만 들어보면 여든다섯이 아니라 '다섯 살 인생'처럼 보일 만큼 겉만 노인이고 속은 어린이들이셨다. 다들 어찌나 개구지신지. 매년 연말이면 복지관에서 행사가 열렸다. 어르신들과 그분들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벌이는 연중 가장 큰 잔치였다. 이날엔 지난 1년 동안 했던 일들을 발표하고, 그동안 갈고닦은 장구나 단소 실력을 뽐내시거나, 수업 시간에 만들던 작품들 전시했다. 한마디로 다섯 살 꼬마아이들의 어린이집 학예회와 비슷한 행사였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르신들 모두 똑같은 말씀들을 하셨다. 역시나 다들 어찌나 솔직하게들 표현하시는지.


 "여보, 많이 늦었지만 사랑한다."는 뒤늦은 고백,


 혹은

 

 "얘들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후회하는 말씀들.


 이미 한참 전에 세상을 떠난 옆지기에게 '사랑했노라고', 혹은 그동안 티격태격하느라 고맙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못해 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라고 이제사 털어놓는 절절한 고백었다. 매사에 장난만 치던 반장 할머님도 편지를 읽을 때 만큼은 세상 진지한 분이셨다. 어르신들께서 오랜 세월 동안 마음 속으로만 묵혀둔 그리움과 미안함이 어찌나 진득하고도 매웠는지 다들 눈시울이 벌게졌다. 조용한 가운데 나지막이 편지 읽는 소리만 울려 퍼지던 행사장에서는 눈물을 닦기 위한 손수건과 소맷자락들만 분주하게 바스락거렸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나는 편지의 수신자 아님에도 코끝이 절로 찡해졌다.


 가슴 저릿했던 연말 행사를 치르고 학기가 끝났음에도 거의 1년 넘게 매주 복지관에 들렀다. 그러나 회자정리라고, 마침내 구직에 성공하고 일이 바빠지면서부터 발길이 뜸해지게 되더니 어느 때부터는 나가지 않게 됐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 실은 이제 종종 맞이하게 되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견디지 못해서였기도 했다. 분명 엊그제까지만 해도 즐거웁게 퍼즐 놀이를 함께 했 어르신께서 오늘은 왜 오셨여쭤봤더니 그 며칠 사이에 돌아가셨다는 대답이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안타깝지만 이제는 영영 만날 수 없다고.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연인과 헤어졌을 땐 어쩌면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 거란 기대라도 할 수 있다. 이 다르게 재회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완전한 이별을 거듭 받아들이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네 번째, 아니, 아마 다섯 번째의 죽음을 겪고 나니 도저히 그곳에 다시 나갈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 처음 복지관에 왔을 때 복지사분들께서 왜 그리 굳은 얼굴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끊임없는 상처와 회복의 돌이질이 그들의 감정을 무뎌지고 딱딱하게 만들었으리라.






 복지관에 봉사 활동을 나갔던 짧은 기간 동안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매 순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사랑을 표현해야겠다고. 그래야 훗날 머리칼이 희끗한 나이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후회하미안해하고 눈물 흘리면 무얼 하나, 지금 잘해야지. 그러니까 어색하다는 변명을 대며, 평생 그런 말을 해 본 적 없다며, 남자답지 못하다며, 나는 지금 당장 그런 고백을 할 이가 없다며 '사랑한다는 말'을 자꾸 나중으로 미루지 말아야겠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사랑한다 말해야겠다.


 그런 다짐 덕분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치 밑 빠진 독처럼 사랑의 여부를 확인하려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 달라는 여자 친구를 만났다. 꽤 오랫동안 연애를 했고 결혼도 했으며 아이까지 낳았다. 그런데 연애를 8년 하고 결혼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하루에 몇 번이나 정해진 의식처럼 "사랑해?", "응, 사랑해."라는 질답을 주고받는 걸 보면 나는 나중에 나이 먹고 후회할 일은 없을 듯하다. 이미 충분히 사랑 고백을 해 왔다.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주자 아직 성에 차지 않은 듯한 반응이다. 아직 한참 멀었다고. 뭐라구, 그 말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다고? 그럼 계속할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네가 좋아하는 마블 영화에서 나왔던 표현인 '3천 만큼'이 얼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


 너도 나도 우리도, 우연 지나가며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 바로 지금 곧장 누구에게라도 달려가서 "당신을 사랑한다.", 간지러운 말을 많이들 했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다. 장담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