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금성무가 분한 홍콩 경찰 223은 오래된 연인인 메이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4월 1일 만우절에 농담처럼 실연당한그는 옛 연인이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기 시작한다. 유통기한이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인 것들로만 골라서. 딱 한 달만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려보기로 한 거다. 하루 일과처럼 4월 30일에도 통조림 캔을 사러 편의점에 갔지만 다음 날이 유통기한인 물건을 팔 리가 있나. 그는 욱한 마음에 영문도 모를 점원과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인다. 결국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통조림들을 잔뜩 가져오는데 이것 참 처치곤란이다. 지나가던 거지에게 드실래요?하고 건네보는데 그 거지마저도물건을 받아 들더니만성질을 내며 집어던져 버린다.
"이거 유통기한 지난 거잖아!"
영화를 본 사람들은으레 풋풋했던 금성무의 외모에 감탄한다. 마음속으로 정한 날짜까지도 연인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유통기한이 다 된 파인애플 통조림 서른 개를 꾸역꾸역 먹어대는 지질한 모습은 슬프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는 왕가위 감독이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홍콩의 풍경을 찬미하기도 한다. 통조림의 유통기한 날짜를 보며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만 한다면 만 년 후로 하고 싶다."는, 지금 들어보면 다소 유치함에 몸서리쳐지는 대사를 통해 그때 그 시절의 낭만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았던 장면이 '수북이 쌓인 폐기 대상 통조림들'의 모습이었다. 거지마저도 필요 없다며 버리는 물건들이라니. 누군가의 노동, 땀과 눈물이 담긴 상품들이 딱 하루의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모두 쓰레기가 된다.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필연적인 '거대한낭비'의 단면을 엿보는 것 같다.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소비하지 못하고,수요 이상으로 마구 생산해버리는 나머지 잉여 생산물들이 쌓여서 썩어간다. 반면에 지구의다른 한쪽에서는 폐기되는 통조림이라도 하나 먹을 수 있다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낙원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신화를 믿어도 되는 걸까.
철 지난 홍콩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건,나는 오늘도당근마켓 거래를 하러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비효율이 상존하는 지금의 경제 체제. 요즈음의 의식 있는 사람들은 현 체제의 대안으로 '협동조합', '공유 경제'니 '로컬 경제' 같은 개념들을 말한다. 또다시 자원을 사용해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보단 사용했지만 아직 쓸 만한 중고 물건을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환하고, 주소지 등록을 통해 믿을 만한 인근 이웃들 사이에서만 거래가 가능한 지역 친화적인당근마켓. 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안 경제의 모습인가...
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당근마켓 거래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모든 걸 새 걸로만 샀다. 내 아이에겐 좋은 것만 주고픈 마음이었다. 젖병도 아기 옷도유모차도 아기띠도장난감도 모두. 키워보니 그제야 알게 됐다. 아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자라기에 지난달에 쓰던 물건이 이번 달에 당장 필요 없게 된다. 젖병은 때마다 큰 걸로 바꿔줘야 하고, 한두 달 전에는 품이 남던 옷이 팔다리가 두세 뼘이나 튀어나올 만큼 작아지고, 한동안 잘 갖고 놀던 장난감에는 이제 더 이상 잠시나마의 관심도 보이질 않는다. 무쓸모한 아기 물건들이 마치 유통기한지난 통조림들마냥방구석에 한가득 쌓이게 되자 아내는 마침내 당근마켓 어플을 깔았다.
분명 어플은 아내의 휴대폰에 깔려있는데 어째 매번 거래하러 나가는 사람은 나다. 그래도 기꺼이 심부름길을 나서는 건, 코로나 시국이라 매일 집과 회사만 오가는 중에 이렇게나마 낯선 누군가와 조우할 수 있다는 설렘 덕분일까. 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에 나가야 한다.거래 상대방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만남의 순간은 매번긴장된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저 양반인가, 이쪽을 바라보며 걸어오는 저 아저씨인가, 혹은 인근 도로에 비상등을 켜고 서 있는 차에서 내리는 저분인가. 나도 상대방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서로를 슬몃 살핀다. 그때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려고 하거나, 혹은 손에 박스나 비닐봉지 따위를 들고 있거나, 아니면 지갑을 꺼낸다거나 하는 등의 액션을 취하면 비로소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걸어볼 차례다.
"저기 혹시... 당근?"
"네네, 맞아요. 당근 당근. OO 사러 오신 분이죠?"
"아, 네. 와이프가 시켜서."
"저도 그래요. 와하하하."
열이면여덟, 아홉은 아내의 명령을 수행하러 나온 나 같은 처지의 남편들과 거래했다.그렇게 8개월 동안 많은 물건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다.백일도 안 돼서 모유 수유를 끊었기에 필요 없어진 수유패드, 금방 키가 훌쩍 크는 바람에 딱 두 번만에 못 쓰게 된 작은 사이즈 아기띠는 일찌감치 떠나보냈다. 아기체육관은 한창 가지고 놀다가 어느 날부턴가 채 3분도 집중하지 않길래 팔아야만 했다. 팔기만 한 건 아니다. 범보 의자, 쏘서, 보행기, 겨울 패딩 같은 물건들과 에듀볼과 에듀테이블 등의 장난감들은 마치 새 것 같은 것들로 싸게 잘 사 왔다. 처음 만났을 때 이게 웬 신문물이냐며 감탄했던 타이니러브 모빌은 한동안 잘 쓰다가 사 온 가격 그대로 다시 되팔기도 했다.당근마켓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아이의 장난감을 당근마켓에 팔 때 의식처럼 꼭 하는 행위가 있다. 장난감을 포장하기 전에 아이앞에 세워두고작별 인사를 시킨다. 나는 헤어짐을 앞둔 두 연인 옆에 앉아 농반진반으로 배경음악을 흥얼거린다. 015B의 '이젠 안녕'이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고작 8개월짜리 아이가 이별의 아픔에 대해서 뭘 알겠냐마는, 이때만큼은 떠나가는 장난감을 애처롭게 쳐다본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맺혀있다. 하지만 슬픔의 순간은 찰나일 뿐.다음 주에 가져다준 새 장난감, 아니, 실은 누군가가 썼던 헌 장난감에 금세 흥미를 보이는 아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만져보고 껴안아보고 지나치게 흥분하여 심지어 혀로 핥기까지 하면서 난리법석이다. 떠나간 옛 연인은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새 장난감에 정신이 팔린 아이를 보고 있으니 불현듯 겁이 난다. 먼 훗날 언젠가, 결국에는 우리 부부도 아이에게 헌 장난감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고.아이가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면 더 이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 없는 날이 오고야 말 게다. 누가 될진 모르겠지만 새 장난감 같은 본인의 반려자와 함께 살아가는 날이 올 거다. 그때가 되면 우린 어떤 감정이 들까. 자식을 다 키웠다는 후련함을 느낄까, 너도 이제 다 컸구나 하는 대견함에 가슴 벅찰까,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는 슬픔에 젖어들까. 회사에서 소문난딸바보인 H형은 두 딸아이 모두 시집보내지 않고 아빠하고 평생 같이 살게 할 거라고 한다. 아이들도 "아빠가 제일 좋아, 아빠하고 평생 같이 살 거야."라고 얘기한다면서. 예전에는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기곤 했는데 그게 무슨 마음인지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은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주말에는 어떤 장난감과 헤어지고 또 다른어떤 장난감과 만나게 될는지. 아내가 이미 잘하고 있지만,합리적인 경제인으로서모쪼록 우리 건 비싸게 팔고 남의 건 싸게 살 수 있기를. 그리고 아이가 떠나가는 것들에 대해 그동안의 추억에 감사는 하되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나온 대사였던가.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라고. 장난감과의 이별도 마찬가지란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