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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Feb 11. 2021

도련님과 도련놈, 그리고 동요 노랫말

기존의 일상적인 세계에 대해 완강히 저항할 수 있길

 "도련님도 좋은 분 만나실 거예요."


 아내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명절, 시부모님 앞에서였다. 표정도 말투도 자세도, 소위 새아가의 어색한 티가 역력했다. 특히 더 낯설었던 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편하게 불렀던 내 동생에게 깍듯이 '도련님'이라며 존대하는 모습이었다.


 아내와 나는 동갑이다. 내 동생은 나보다 세 살이 어리다. 결혼 전에도 드물지만 아내와 동생과 셋이서 종종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땐 아내가 내 동생에게 말을 편하게 했다. 아내도 남동생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쪽 역시 똑같이 세 살 차이가 나는지라 내 동생도 자기 동생처럼 느껴졌을 테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내 동생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아내가 쓰는 호칭과 말투가 달라졌다.


 하나 더 이상한 건, 처갓댁에 들렀을 때 나는 처남에게 '님'자는커녕 예전처럼 이름을 부르며 편하게 대했다는 거다. 내 동생과 마찬가지로 아내의 동생 역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으니까.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처남도,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내만 억울하겠다 싶었다. 왜 시댁에서는 아내가 도련님에게 존대하고, 친정에서는 남편이 처남에게 하대하는 걸까. 둘은 나이도 같은데.    


 "그럼 이제부터 우리끼리 있을 때는 도련님이 아니라 '도련놈'이라고 부르자."


 농반진반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 동생을 지칭할 때 도련놈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나는 네 동생을 부를 때 '처남님'이라고도 하지 않고 존대를 하지도 않잖아. 이렇게라도 균형을 맞추면 조금 덜 억울하지 않겠냐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말 같잖은 소리라 웃어넘기던 아내. 하지만 내가 하도 도련놈 도련놈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니까 시나브로 그게 귀에 익숙해나 보다. 어느 도련놈이라는 어를 입 밖으로 쉬이 꺼내게 됐다. 문제는 너무 입에 붙어서인지 시댁에서조차 "도련노.."까지 말하다가 황급히 입을 막는 사고 아닌 사고가 벌어질 뻔했다는 것. 이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교육의 위력을 느꼈다. 과연 끊임없는 반복은 효과가 있다며 좋아라 하다가 만 남았을 때 아내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네가 하도 그러니까 나도 실수할 뻔했다고.


 시부모님 앞에서 경을 칠 뻔한 이후로 둘만 있을 땐 도련놈이 아니라 '네 동생'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왜 굳이 내 동생에게 놈 자를 붙이며 아래로 끌어내리려 했던 걸까. 처남을 처남님이라며 위로 끌어올려 균형을 맞출 수도 있었는데. 전히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진정한 평등을 위해서는 앞으로 처갓댁에 들렀을 때 처남에게도 존댓말을 해야 하나 싶었다. 다행히도 아내와 처남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 만날 일이 별로 없다. 게다가 코로나 19 때문에 이번 명절에는 상봉의 순간도 없을 예정이다. 고민 해결은 잠시 유기로 했다.


 몇 년 전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 용어 캠페인을 벌인 적 있다. 발단은 왜 여성은 남편의 가족들에게 높임말을 써야 하냐, 는 질문에서다. 국민권익위원회와 국립국어원에서 실시한 '일상 속 호칭 개선 방안'에 참여한 여성들의 94.6%가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 같은 호칭을 바꿔야 된다 답했다 한다. 그 결과가 이런 캠페인으로까지 이어진 거. 역시 이런 호칭들은 당연히도 나만 이상하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최근에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한때 쓰기도 했고 여전히 쓸 수도 있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아니, 쓰지 말아야 하는 말들에 대한 글을 모으는 프로젝트였다. 이를테면 '도련님' 같이 여자들이 시댁에서 써 왔던 낡은 표현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무심코 써 왔던 '병신'이니 '여배우' 같은 차별적인 단어들, '여자애는, 혹은 남자애는 이래야 해' 같은 편견 어린 표현들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쓸데없는 데 돈과 시간 낭비다는 비판도 있을 게다. 돈 없어 밥을 굶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고 경제가 죽어가는데 한가롭게 그런 짓이나 벌이고 자빠졌으니 한심허다 한심해. 혀를 쯧쯧 차면서. 그런 거 하면 이 나오냐, 이 나오냐. 역시나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먹고사니즘'의 추종자들이 으레 입에 담는 비난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식을 변화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 말은 사고를 규정하 존이므로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자님 역시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정치란 무릇 '바로잡는' 것이며, 바로잡는 것의 첫번째는 '말'이라고. 렇게 한 발자국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 도련놈과 처남님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더 나은 에 도착할 수 있을 게다.


 이렇듯 말의 힘이 무섭다고 생각하는지라 아이 앞에서도 늘 말을 조심하려 한다. 좋은 말, 좋은 소리, 좋은 노래만 들려주려고 애를 쓴다. 아직 9개월 차 아이라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뜻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뉘앙스인지는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것 같다. 부정적인 말을 할 때는 인상을 쓰거나 울먹거리기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할 때는 덩달아 생글거리거나 신나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을 입에서 뱉을 때가 있다. 육아가 너무 괴롭고도 힘. 엊그제는 새벽 3시 즈음에 아이가 우는 소리에 놀라 아이 침대로 달려갔다. 쪽이를 물려봐도 안아줘도 도저히 울음이 그쳐 지지가 않았다. 요즘 일이 많아서 가뜩이나 피곤한데 대체 너까지 왜 그러니. 비몽사몽한 가운데 아이를 계속해서 달래 봤지만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 와중에 쿰쿰한 냄새가 올라와서 아래를 쳐다보니, 아뿔싸, 똥이 기저귀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옷과 이불에도 아이 몸에도 내 팔에도 사방팔방 시커멓게 똥이 묻어있다.


 "아이, ㅅㅂ. 힘들어 죽겠네. 진짜 돌아버리겠다. 너 왜 그래!"


 화를 버럭 내니 아이가 놀라서 일순 울음을 멈추더니 이내 더 큰 목소리로 얼굴이 시뻘게져서 울어댔다. 벌집을 건드려 버린 양. 간신히 진정시키고서 옷을 하나씩 벗겼다. 때 아닌 야밤의 목욕과 도로 잠재우기와 빨래 돌리기의 한바탕 소동이 이어졌다.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비된 자로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내 역시 육아에 치이다 보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 종종 육두문자를 내뱉곤 한다. 그리고 나와 똑같이 아이에게 사과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내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우리 이제 입 밖으로 욕이 나오려 할 때 '아버지'라고 바꿔서 외치자고. 'ㅅㅂ'이나 'ㅈㄴ' 같은 단어를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의 맞춤법 수정 기능처럼 자동 변환해서 말하기로 했다. 그런데 몇 번 해 보니 마치 독실한 교회 신자가 된 것 같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집사님도 아닌데 하루에도 몇 번씩 어찌나 아버지를 불러대는지. 으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이이! 제발 좀 아버지. 으아아아아!


 바르고 고운 말뿐만 아니라 동요도 열심히 들려준다. 그러고 보니 작년 한 해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무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빛나는 BTS의 'Dynamite'도, 년에 한가닥 했던 언니 오빠들이 합심해서 결성한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도, 이것이 바로 조선의 힙함이라 불리던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그렇게나 틀어댔던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도 아닌, 핑크퐁의 '상어 가족'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아이들을 잠시나마 얌전하게 만들어주는 이 마법 같은 노래와 영상이 없었다면 아들의 손톱과 발톱을 깎을 엄두도 못 냈을 거다.


 그런데 듣다 보니 어째 가사가 이상다.


 뚜루뚜뚜한 아기 상어네 가족은 빠, 엄마, 그리고 할아버지할머니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어디로 간 게야. 내에게 이것 좀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라고도 한 적 없는데? 외가네 조부모님들일 수도 있지. 다 같이 산다고 꼭 남편 쪽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편견 아니야?"


 아기 상어네는 그렇다 치더라도 개구리네는 달랐다. 아이가 갖고 노는 에듀테이블에서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가 나올 때가 있다. 이 집은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 노래를 부르는 민폐 가족이다. 여기는 확실히 아내가 시집살이하는 곳이다. 동물은 대부분 모계사회라던데 왜 인간의 전통적인 가족상이라는 걸 노랫말에 녹여놨을까. 귀를 의심케 하는 가사도 있었다. '잉잉잉'이라는 노래에서는 '오이밭에 오이는 날씬한 오이'인데 '동글동글 호박이 놀러 왔다가 나는 언제 예뻐지나 잉잉잉'하고 운단다. 아이에게 그릇된 외모관을 아무렇지 않게 심어주다니. '곰 세 마리' 가족 역시, '아빠는 뚱뚱하고 엄마는 날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빠가 된 덕에 로 오랜만에 동요를 는데 정말로 가사가 이랬었나 하며 귀를 의심케 된다.


 부디 아이가 요가 려주는, 책이 알려주는, TV나 인터넷이 보여주는 의 모습일찍이 들지 않길 바란다. 들 별다른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기존의 세계에 얌전히 순응하기보다는, 무언가 이상한 점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완강히 저항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한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 편견 어린 말들을 함부로 내뱉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았는지 새삼 깨닫 요즈음이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 아이에게 좋은 것만 들려주려 하지 않았다면 영영 생각해보지 않았을 일이다. 


 그나저나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이렇게 따지다 보니 들려줄 만한 동요가 몇 개 남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아... 옛날 사람)
아니. 동글동글 호박이 어디가 뭐 어때서 못생겼대.
엄마 곰이 어찌나 날씬하게 표현됐는지, 저건 곰이 아니라 마치 강아지 같은데...
이것저것 많이 배우되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사실 BTS도 엄청 들었다. 7명 모으려고 칠성사이다 몇 통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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