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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Feb 28. 2021

우리 아이는 클래식을 듣습니다

취향과 허영 사이, 그리고 교육 방향에 대한 고민

 이상하다. 아이가 언제 이렇게나 자란 걸까.


 매일 이어지는 고된 육아의 날들 속에선 느끼지 못했다. 어제도 오늘과 비슷했고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 같았다. 아이가 얼른 자라나길 기도했다. 틀린 생각이었다.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보면 불과 몇 주 전 혹은 몇 달 전과 비교한 지금의 아이 모습이 어찌나 다른지. 한동안 머리카락이 죄다 빠져 민둥산이 됐던 머리는 어느새 숱이 무성해졌고, 분유만큼이나 이유식도 제법 먹게 됐으며, 뒤집기도 못하던 녀석이 이제는 주변 사물들을 붙잡고 혼자서 두 발로 일어선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이는 시나브로 시나브로 커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엊그제는 어느덧 300일을 맞았다.


 아이가 요즘 가장 즐겨하는 놀이는 거실 책장에서 책을 꺼내서 보는 거다. 자랑은 아니지만, 장난감과 인형이 아니라 벌써부터 책을 갖고 논다. 서재 공간이 부족해서 거실 창가 쪽에 책장을 뒀는데 덕분인지 아이가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 물론 책을 ‘보는’ 것뿐이지 아직 글자를 모르니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마치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책 페이지를 한 장 두 장 넘겨가며 본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조그맣고 가느다란 엄지와 검지를 쫘악 펼치고선 페이지 사이에다 넣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윽 밀어 넘기는데.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제법 그럴싸하게 어른의 책 읽는 모습을 재현한다.


 예전에는 어떤 책이 본인 것인지도 구별하지 못했다. 책장 1층에 꽂혀있는 거시경제론, 교육사회학 원론, 통계학 따위 어른용 책들과 2층에 자리 잡은 그림책, 동시집, 노래가 흘러나오는 사운드북 같은 아이 책들을 손에 집히는 대로 마구 꺼냈었더랬다. 거실 바닥에 온갖 종류의 책이 중구난방으로 떨어져 있으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많이 발전했다. 책장까지 영차영차 열심히 기어간 뒤 1층의 책은 무시하고 선반을 잡고 일어서서 2층에 있는 아이용 책들만 골라서 꺼낸다. 원하는 책들만 다 꺼내고선 자리에 풀썩 앉아 페이지를 넘겨가며 본다. 그런 걸 다 기억하다니, 고놈 참 영특하다.


 이쯤 되면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긴다. 고작 10개월 남짓한 녀석이 자기가 볼 수 있는 책을 기억할 수 있고, 정확하게 그 책을 구분하여 집어서 꺼내는 데다, 페이지를 넘겨가며 자못 정독한 후, 지식에 굶주린 사람처럼 금방 다음 책을 꺼내서 펼치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혹시 ‘우리 아이가 천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고, 아이에게 조기교육까지는 아니지만 무언가 더 대단한 걸 가르쳐야 하나, 같은 의무감 비슷한 것도 생기는 것이다.


 아이를 보는 중에 TV로 유튜브를 튼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아이에게 TV 영상이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봐 하루 온종일 라디오만 틀었었다. 이제는 TV도 종종 켜 둔다. 걱정과는 달리 아이가 멍하게 TV 화면만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덕분에 아이가 책을 보거나 에듀테이블 따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 내가 보고 싶은 영상을 틀었다. 한 눈은 아이를 살피고 다른 눈으로는 TV를 봤다. <나얼의 음악세계>에서는 그루브한 흑인 음악을, <최자로드>에서는 이곳저곳의 맛집을, <네이버 온스테이지>에서는 근래 핫했던 이날치를 비롯한 인디 팀들의 공연을, <서울워커>에서는 서울 여기저기를 걷는 영상을 보면서 바깥나들이 대리 만족을 얻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영특한 아이에게 뭔가 교육적인 영상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선택한 영상은 클래식 공연 실황들이었다. 서울시향의 신년음악회, 예브게니 키신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조성진이나 손열음의 피아노곡, 로열오페라하우스 채널의 유명한 아리아들까지 여러 영상들을 보여줬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쥐고 있는 각양각색의 악기들과 화면에서 들리는 음악들이 신기해서였을까. 아이는 처음으로 접하는 클래식 영상을 잠자코 앉아 감상했다. 하지만 불과 5분 정도였다. 재미가 없는지 금세 흥미를 잃고 책장으로 돌진해서 그림책들을 냅다 꺼내기 시작한다. 그놈의 핑크퐁 영상은 10분이고 20분이고 숨쉬는 법도 잊어버린 양 집중해서 보더니만.


 “애가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억지로 그런 걸 가르치고 있어? 자기가 좋아하는 걸 보고 들었으면 좋겠는데.”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나에게 아내가 한 마디 했다.


 “그래도... 이런 걸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더 좋잖아.”


 왠지 변명하듯이 아내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내의 다음 말에 더 이상 대답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너도 지겨워서 꾸벅꾸벅 졸더니만. 돌도 안 된 애가 어떻게 클래식을 좋아하겠니?”


 그래도 아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으면 한다. 아이돌 음악도, 힙합도, 빌보드 핫 싱글 차트인 곡도 나쁘진 않지만 기왕이면 더 어렵고 고상해 보이는 취향을 가졌으면 한다. ‘난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할래’와 같은 태도는 일견 쿨해 보인다. 자신의 취향을 확실히 알고 그것을 즐기는 쿨한 삶.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의 한계를 미리 단정 짓는 행위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는 건 한 우물에만 계속 머물러 있겠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다소 낯설고 어려운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즐기려고 애쓰는 게 더 멋있어 보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게 어쩌면 취향의 계발이 아니라, 허영이나 자기 과시의 모양새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이에게 왜 하필이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려 하는 걸까.


 영화 <리플리>에서 하류층인 호텔 벨보이 리플리(맷 데이먼)는 재즈 음반들을 공부한다. 상류층 자제인 디키(주드 로)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다. 재즈광인 그의 취미를 배우는 것이 목표. 처음엔 쳇 베이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지만 그의 곡인 ‘My Funny Valentine’까지 따라 부를 수 있게 되고 색소포니스트 ‘버드’ 찰리 파커의 음악을 구분해내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그제야 공부를 끝내고, 재즈 음반을 매개로 디키에게 우연인 척 가장한 첫 만남을 가진다. 이른바 신분 상승을 위한 첫 발걸음이다. 영화에서 재즈는 단순히 취향을 드러내는 소재가 아니다. 자산가 계급이 누리는 고상한 취미이자 그들만의 자본이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첨예한 계급적 표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아내 눈에는 나 역시 리플리처럼 보였을까. 아이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소위 고상한 취향을 가지게 되면 상류층 혹은 적어도 중산층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물적인 바람을 가진 사람으로. 그렇지만 물려줄 만한 부동산이니 주식이니 하는 금융 자산이 없으니 문화적 자본이라도 심어줘야지 별 수 없다. 나는 클래식을 들으면 꾸벅꾸벅 졸기 바쁘지만 우리 아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바이올린 정도 악기를 하나 연주할 수 있고, 유명한 곡들의 작품번호니 모차르트의 쾨헬, 슈베르트의 도이치 번호 같은 것들도 줄줄 꿰고, 교향곡의 악장 구분도 쉬이 할 수 있는,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이건 어쩌면 내가 이루지 못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걸 수도 있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출세와 성공을 위해 취향을 억지로 가르치는 비릿한 욕망 같은 것일 뿐이라고.


 아직까지도 아이에게 무얼 가르쳐야 할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길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어차피 아이 교육은 육아를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니 언젠가는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다만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서 오늘도 아이에게 클래식을 들려준다. 아니, 아이와 함께 클래식을 듣는다.




서울시향 신년음악회를 유튜브로 보고있는 아이.
어떤 음반을 들어볼까나. 룰루랄라.
책 책 책, 책을 읽습니다. 내 책은 책장 2층에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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