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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Sep 29. 2021

계획대로만 되는 여행은 없다

제주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7년 6월)

밤을 새워가며 꼼꼼하게 짰던 2017년의 제주 여행 계획



1.

 어영부영하다 보니 제주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당장 다음주였다. 달력을 보고서야 일순 깨달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개학이 코앞인데 일기 쓰기와 탐구생활이 한 달치나 밀려버린 여름방학 막바지의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아직 여행 계획서라고는 한 줄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노트북을 켰다. 재작년 제주 여행 때 들렀던 곳과 겹치지 않게, 미리 예약한 숙소와 동선을 고려하며, 그동안 TV나 블로그들에서 봤거나 여행깨나 한다는 지인들이 추천한 명소들을 모두 뒤섞은 계획을 짰다. 30분 단위로 촘촘하게 짜인 '일정(안)'이 만들어졌다. 색 볼펜으로 표시한 제주 지도 '붙임 1' 자료도 함께. 이렇게 몇 시간에 걸쳐 만든 초안에서 아내의 재가를 거친 수정안, 수정 ver.1에서 3까지를 거쳐, 이후 추가 정보를 취합해서 '최종안', 여행 전날에야 비로소 '최최최종안'이 완성됐다. 계획을 세우다 보니 마치 제주 전문가로 거듭난 것 같다. 여기엔 뭐가 있고, 거기엔 또 뭐가 유명하고, 거길 지나면 또 다른 뭐가 맛있고. 툭 건들면, 거리에서 수년간 프리스타일로 잔뼈가 굵은 거리의 래퍼처럼, 한 번도 절지 않고 제주의 모든 것을 읊을 수 있게 됐다.


 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계획을 세우다가 또다시 일순 깨달았다. 래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무계획적인 사람이었다. 공부건 일이건 연애건 여행이건 뭐건,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실하는 행위를 고민해 본 적 없었더랬다. 


 예를 들어 이런 일도 있었다. 동네 뒷산인 관악산에 혼자 올랐던 날. 볕이 좋았던지라 같은 하숙집에 살던 동기 K가 일광건조를 한답시고 밖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때문인지 빨래에서 등산으로 이어지던 자유로운 연상의 흐름에 대한 원리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기실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여하튼 등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방 구석에 처박아 놨던 가방 하나 둘러메고 부리나케 관악산 입구로 갔다. 입고 있던 츄리닝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였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아뿔싸, 쓸데없이 가방을 챙기기만 했지 물도 간식도 땀 닦을 수건도 지갑도, 쥐뿔 아무것도 챙겨온 게 없었다. 물이라도 한 모금 해야지, 하면서 가방을 연 순간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중도에 내려가기 아까우니 갈증을 참아가며 계속 올라갔다. 땀이 흐르는 것과 비례해서 목이 더욱 말랐다. 마침 정상 노점 좌판에는, 산 아래에선 5백 원도 하지 않을 비주얼을 가진, 2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입에 침이 고였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기에 그걸 먹던 꼬마 아이에게서 힘으로 으려 하지는 않았다. 부러워하며 마른침만 삼킬 뿐. 단돈 2천 원이 없어서 아이스크림도 못 사 먹는구나. 하마터면 꼴사납게 울 뻔했다. 입구에서 출발한 지 3시간 여가 지났을 무렵, 마침내 관악산 정상 연주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아래 있는 연주암이라는 암자에서 물마실 수 있었다. 명수로 목을 축이고 나니 꺼져가는 불씨에 마른 신문지를 구겨 넣은 듯 기력살아나서 정상까지 금방 걸어갈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갑작스러운 등산이었지만 정상도 정복했고 이 정도면 탈 없이 순조롭게 마무리가 되나 했다.


 하지만 그날의 불운은 끝나지 않다. 역시나 아무 계획 없이 하산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다. 도중에 몇 번이고 마주치던 안내 표지판마다 문구 마지막에 '서울시 관악구'가 아니라 '과천시'라는 단어가 져 있는 거다. 이상하지만 걱정하진 않았다. 관악산이 오죽 큰가, 관할 지역이 공동으로 겹치나 보지, 돌아서 내려가는 코스가 있나 보지 뭐. 렇듯 생각 없는 사람은 늘 행복한 법이다.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출발했던 곳과 전혀 다른 낯선 곳이었다. 분명 서울대 정문에서 올라갔는데 내려와 보니 과천역. 김연우의 노랫말을 빌리자면 '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같은 상황이었다. 지갑도 돈도 카드도 아무것도 없 일단 전철역으로 들어섰다. 역무원분께 "너무 급해서 그런데 화장실 좀 잠깐 쓰면 안 되겠냐" 개찰구 안으로 들어다. 그리고 한참을 눈치 보다 역으로 들어오는 전철에 냉큼 임승차했다.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서울대입구역으로 돌아온 뒤 또다시 역무원 몰래 개찰구 아래로 기어 나오고 나서야 이날의 소동 끝이 다.


 어렵사리 귀환한 하숙집 방. 도착하자마자 큰 대자로 뻗었다. 기나긴 하루였다. 한숨 돌린 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가방을 정리했다. 그런데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가방을 열어 보니 안에 지갑이 들어있었다. 아까의 목말랐던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2천 원보다 훨씬 많은 현찰 교통카드까지 하나 떡하니 들어있던 지갑. 어이가 없어서 픽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 하루 종일 나는 대체 뭘 한 걸까.


 그렇게 계획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곤 다. 러나 아내는 나와는 전혀 달랐다. 아내는 당일치기 반나절 여행을 가더라도 30분 단위로 칼같이 일정을 짜는 사람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가면서 교통수단이며 식당이며 카페며 기타 돌발사항에 대한 대비책까지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사람. 연애할 때도 약속 시간 30분 전부터 10분, 5분 단위로 너 어디까지 왔냐며 확인하더니 여행도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세우다니. 너 그거 병이야 병, 이라며 어르고 달래 봐도 소용없었다. 돌이켜 보니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 대관절 어떻게 만나서 하나 되어 살아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억지 비유를 갖다 붙이자면 아내는 차가운 아이스크림, 나는 뜨거운 튀김 같은 사람인데, 듣기로는 아이스크림을 튀겨먹는 요리라는 게 있다 하니 모순된 존재들의 불가해한 공이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이었다.


 내와 함께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여행하다 보니 시나브로 게도 병 아닌 병'계획병'이라는 게 옮았. 그래서 2017년의 어느 여름밤, 나는 제주 지도까지 출력해서 색색깔로 볼펜을 칠해가며 밤새도록 계획을 짜고 있던 것이었다. 고심 끝에 완성한 제주 서부 2박 3일 여행 계획. 첫째 날은 서부 해안과 유명한 카페 탐방, 둘째 날은 산방산을 비롯한 몇몇 오름 트래킹, 셋째 날은 북부 해안도로를 일주해서 공항으로 돌아가는 코스였다. 계획표는 제주 출신 K(앞에 나온 하숙집에서 빨래 널던 그 K와 동일 인물)에게도 보여줬다. 네가 보기에 이거 어떻냐고. 현지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가감 없는 피드백을 부탁했더니 돌아오는 대답.

 "이야, 이거 괜찮은데. 나도 이렇게 한 번 가봐야겠다."

 뜻밖이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었다. 엄마, 어쩌다 보니 나 제주 본토 사람한테도 인정받았어.






2015년 제주도 어느 장터에서 팔던 만 원짜리 천혜향과 한라봉



2.

 계획으로 칭찬받은 때로부터 2년 전인 2015년에도 제주에 여행을 갔다. 아내가 아직 아내가 아니라 여자 친구이던 무렵이다. 물론 그때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세운 철저한 계획표와 함께였다. 하지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 않듯이 여행 역시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렇다. 이미 그때부터 우리는 완벽한 계획이라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로 마주한 실패는 둘째 날 이른 아침부터다. 아직 깜깜한 새벽길을 달려 성산일출봉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신년을 맞이한, 으레 작심삼일이지만, 의욕 넘치는 인간들이 하는 짓과 똑같이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이곳에 왔다. 당연히 제주의 돋을볕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전날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좋았던 탓에 해를 보는 데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웬일이랴. 새벽부터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탓에 일출은 고사하고 급하게 산 우비와 모자를 둘러써야 했다. 한숨을 쉬며 넋두리를 했다. 운칠기삼이지 뭐. 소득 없는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니 입구의 스타벅스가 보였다. 성산일출봉 지점은 일출과 시간표를 함께하는 건지 다른 곳들과 달리 일찍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


 "비도 맞고 추운데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고 가자."

 아내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힘든 작업을 마친 죄수들에게 시원한 맥주 한 병이 크나큰 기쁨을 줬듯이, 춥고 지친 우리에게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절실했다. 서둘러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문을 하려고 보니 뭍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생긴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에서만 한정 메뉴로 판매하는 차들이 있었다. 한라산이니 백록담이니 우도 땅콩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것들. 아내도 나도 눈이 동그래졌다. 제주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데 당연히 마셔봐야지. 처음의 맛을 경험하는 건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마주하지 못한 일출에의 아쉬움은 따뜻한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실어 날려 보냈다. 난생처음 보는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봉우리 정상에서와는 달리 마음이 편해졌다. 운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네.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해는 매일 뜨니까.


 셋째 날. 제주 월정리에서 함덕으로 가는  어쯤이었다. 해안 도로를 따라서 운전하는데 햇살이 포근한 이불처럼 감싸고, 길 옆에 펼쳐진 바다눈이 시리게 푸르르고, 적당히 소금기가 배어 있는 짭조름한 맛의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오고, 여튼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만큼 좋았던 간이었. 내가 운전만 잘했으면 말이다. 내비게이션 예상 시간에 맞춘 계획과는 아주 많이 다르게 중간중간 차를 세워야 했다. 장롱면허 10년, 그리고 이제 운전대를 다시 잡은 지 한 달도 안 된 나에게 해안가 운전은 다소 버거웠다. 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얼마나 겁나던지. 그래서 어느 정도 달렸다 싶으면 차를 잠시 세우고 바닷가를 거닐다가 다시 차에 타서 달리고, 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 그러다 어느 정차 지점에서 우연히 장이 열린 걸 다. 재래시장 구경 재밌으니까, 예정에 없던 장터 구경을 하기로 했다.


 바닷가 장터는 볼거리가 많았다. 펄떡거리는 생선이며 살아 움직이는 전복과 오분자기,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감귤과 땅콩 막걸리, 그리고 향긋한 내음을 마구 풍겨내던 천혜향과 한라봉까지. 동춘서커스를 난생처음 보는 소년의 얼굴을 하고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기 바빴다. 한참을 돌아보다 시장 구석까지 왔을 때, 아내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외쳤다.

 "와아, 저것 좀 봐. 빨간 다라이가득 채운 천혜향이 만원밖에 안 하네." 

 겨울은 나간 지 한참이고 이제 봄과도 이별하는 무렵이니 제철이 지난 걸 싸게 파는 듯다. 혹여나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까 봐 천혜향을 팔던 할머니께 얼른 만원을 쥐어드리고 한 바구니를 들고 왔다. 차에서 주전부리 삼아 하나 까먹어 봤더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 있. 여태껏 먹어왔던 귤 종류 과일 중 최고였다. 상큼한 천혜향 향을 입 안 가득 머금은 채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이것 역시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원래 일정대로가 아니면 뭐 어때, 덕분에 이런 재미도 있는 거지.


 여전히 출발 전에 열심히 계획을 세우지만,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 게 여행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뜻하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마주하는 것에 대해 낯섦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게 됐다. 오히려 예상외의 순간이 닥치길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어그러짐이야말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하며. 억에 오래도록 남아 훗날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 생각한다. 다음 제주 여행은 그동안과 달리 작년(정확히 말하자면 2020년 5월)에 태어난 아이와 함께일 테다. 아직 통제되지 않는 제멋대로인 아이와 함께이니만큼 아마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게다. 그렇지만 기대된다. 어떤 놀랍고도 즐거운, 계획에 없던 순간들이 펼쳐질까.





(2015년 5월, 제주에서)

전날만 하더라도 해가 쨍쨍했는데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안개비가 부슬거리던 성산일출봉


제주 북동부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주상절리의 멋진 풍경


섭지코지 안도 다다오의 건물에서


비자림에서의 우리들



(2017년 6, 제주에서)

고기국수와 성게국수


이호테우해변의 빨간 목마 등대


부슬부슬 이른 안개비가 내리던 산방산


어승생오름에서 바람을 맞으며


협재해변에서


애월바다의 오징어들, 잘 말라가는 중이다



(2019년 6월, 제주에서)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길


정방폭포가의 해녀 이모님들


백약이오름에서


예쁜 카페 찾아 삼만 리


외돌개에서 노을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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