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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Sep 20. 2019

가족을 먼 곳으로 떠나보내는 심정

서울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7년 4월)

창경궁 통명전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아내의 할머니, 그리고 둘째 고모 내외분




 아내의 고모님들은 미국에 살고 계신다. 첫째 고모님은 푸른 눈의 미국인과 결혼해서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신다. 둘째 고모님은 젊었을 적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모부와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다행히도 완전한 이별은 아니다. 미국이 옛날처럼 이역만리도 아니고 비행기 한 번이면 얼마든지 오고 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혼혈인 외국인 사촌들이나 고모님들은 2, 3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르곤 한다. 아내의 조모님께서는 먼 곳으로 떠난 딸자식들을 보려고 5년에 한 번 꼴로 미국 여행을 가시기도 한다. 종종 캘리포니아 여행을 즐기시는 구순에 가까운 서울 할머니라니, 그동안 평생 본 적 없던 힙한 노인이시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 말에도 미국에 다녀오셨더랬다)

 미국에서 처가댁 식구들이 한국에 오면 여행 가이드라도 된 양 이곳저곳을 안내한다. 나도 서울에 산 지 어언 10년이 넘었고 서울살이가 몇 년인데 이 정도 살았으면 이곳 지리 정도는 빠삭하다,고 주장한다. 본래부터 여기 사람인 양 가이드를 하는 걸 보니 촌놈 출세했다 싶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남 없이 지겨웁게 들르곤 하는 삼청동이니 인사동이니 하는 곳들과 조선의 고궁 몇 군데, 나름 힙한 곳이라면서 홍대나 연남동이나 성수동의 왁자지껄한 가게들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이긴 하다. 가이드라는 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나 서울의 여기저기를 줄기차게 쏘다녔으면서도 누군가를 이끌고 서울 여행을 하려면 막상 자신 있게 데리고 갈 만한 곳이 마땅찮다.


 그런 와중에도 귀빈들에게 늘 반응이 좋았던 건 서울 시내에 있는 조선 고궁 산책이었다. 낮이건 밤이건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라도 궁궐 나들이는 운치가 있다. 전 세계를 뒤져봐도 이런 곳은 흔치 않을 게다. 오래되고 단정한 기와지붕 너머로 도시의 높다랗고 차가운 빌딩 숲이 보이고 먼 곳으로는 우뚝 솟은 북악산이, 차를 타고 터널 하나만 지나면 한강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런 곳이 또 어디 있겠나. 게다가 전통과 현대, 자연과 문명, 상업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이 모든 게 족보도 잊은 채 한데 뒤섞인 것이 그야말로 한국적인, 요즘말로 'K-스럽지' 아니한가. 나뿐 아니라 아내의 외국인 사촌들에게도 이곳은 인상적이었나 보다. 클럽이니 카페니 하는 소위 힙한 곳들도 좋아했지만, 덕수궁에 왔을 때 유독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선 직후부터 내내, 들 말로는 셀피, 우리 말(?)로는 셀카를 엄청나게 찍어대고 난리였다.


 서울 여행 가이드는 모든 게 다 좋았는데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영어에 지독하게 약해서 그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궁을 설명하려니 대체 무슨 단어를 써야 할지 난관에 난관이었다. 수능 영어 1등급 따위는 별무소용이었다. 하긴 그게 벌써 20여년 전이다. 여하튼 머리 속에서 가물거리는 단어를 잡아보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등허리로는 보이지 않게 땀이 흐르던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들을 10년 전 즈음인가 처음 만났을 때 더듬더듬 거리며 이런 말을 했었더랬다.

 

 "넥스트 타임, 마이 잉글리시 레벨 업 업, 아이 프로미스."


 나도 웃고 아내도 웃고 아내의 친척들도 웃었다. 괜스레 얼굴이 또 붉어졌다. 허공에 흩어져 사라져 버린 웃음소리처럼, 덧없는 약속 또한 지키지 못하고서 흩어져 버렸다. 수능 영어 공부도, 취업준비를 위한 토익 공부도, 직장에서 해외 영업을 위한 비즈니스 잉글리시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지라 도통 영어가 늘 리가 없다.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파는 법인데 나는 딱히 갈증이 나진 않았으니까. 차라리 얘들이 한국말을 배우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첫째 고모님은 아이들에게 왜 한국말을 안 가르치셨나 모르겠다. 영영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니시면서. 무슨 사연이 있어서일 거라 추측하지만 감히 여쭤볼 수는 없었다.

 몇 년 전엔 둘째 고모님 내외분이 오랜만에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그땐 창경궁 봄나들이를 함께했다. 서울에서 제대로 된 꽃놀이 명소로 여의도 윤중로, 잠실 석촌호수, 강남 양재천길 등을 꼽지만 개인적으로는 궁궐의 봄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가서 걷다가 연결되어 있는 창덕궁으로 건너가서 흐드러지게 핀 꽃과 짙어진 녹음을 자랑하는 후원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한다. 그리고 다른 전각들과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소박한 멋이 있는 낙선재 앞뜰에 한참 동안 앉아 있는다. 창덕궁의 옆문으로 빠져나와, 후원의 서쪽에 자리잡았다 하여 원서동이라 이름 붙은 동네의 단골 찻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다. 이렇게 봄의 한가운데서 즐기는 궁궐 꽃놀이의 완성이다.


 한국을 떠난 지 몇십 년이라 궁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라고 하시는 고모님. 몇 년에 한 번씩 종종 서울에 들르긴 했지만 궁에 오실 일은 딱히 없었다며, 마치 난생처음 들른 곳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다며 감탄사를 내뱉으셨다. 고모님은 아이처럼 신나 하며 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다. 경보 선수도 아니신데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행동거지도 거침이 없으셨다. 나는 몇 번 뵌 적도 없는, 사실상 초면임에도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 참지 않으시고 좋고 싫은 건 표정에서부터 숨기시질 못한다. 마치 해맑은 소년 같은 것이 아내 성격과 행동을 꼭 닮았다. 아니, 아내가 고모님을 닮은 거겠지. 장모님도 장인어른도, 아내를 길러 주셨던 할머님도 과묵한 성격이셔서 대체 아내는 누구를 닮은 건가 궁금했었는데 그날에서야 의문이 풀렸다. 씨도둑질은 못다더니만 과연.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길. 제법 오르막길을 잠시 걷다 보면 창덕궁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벤치가 두어 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앉으면 아래로 창경궁 통명전 기와지붕이 내려다 보인다. 봄날의 한가로운 정취를 고즈넉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내의 고모님, 고모부님, 그리고 할머님. 이렇게 세 분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한참이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때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하고 계셨을까. 쉬이 걷어낼 수 없는 갑작스럽고도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고, 이내 별말없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 사이에 끼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따라가기만 할 이었다.


 고모님네와 같이 궁궐을 비롯한 서울 나들이도 함께하고, 동네 맛집도 다니고, 함께 거나하게 술도 마시고 하다 보니 금세 며칠이 지나갔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을까. 이제는 다시 머나먼 이국 땅으로 떠나야 할 때. 며칠 새 많이 친해졌던 고모님께서 울먹거리며 말씀하셨다.

 "이제 가면 또 언제 만나니." 

 "미국이 멀지도 않은데요, 곧 한번 찾아뵐게요."

 나도 왠지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머니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깨만 늘어뜨리셨다.


 고작 며칠 같이했던 나도 이러는데 배 아파 낳은 피붙이를 먼 곳으로 떠나보내시는 아내의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이별 이후 얼마나 많은 밤을 그리워하며 마음을 저려하셨을까. 다시 얼굴을 볼 날을 세어가던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타국에 가족을 보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해가 지날수록 덧없이 숫자만 늘어가는 나이듦 때문에, 그리고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19라는 역병 때문에 가족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지도 못했던 한때. 얼마나 더 그리움의 농도가 짙어졌을는지. 아무리 국제전화며 영상통화 따위를 한들 그리움이 옅어지기는 할까.


 요즈음엔 1인 가구며, 한부모 가정, 동성 부부, 셰어하우스에서 핏줄처럼 지내는 이들 등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라 부를 만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하나의 핏줄로 이어져 있다 해서 꼭 가족인 건 아니다. 한 집에서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서로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남보다 못한 사이일 때도 있다. 같이 살지 않거나 핏줄로 이어져있지 않다 하더라도 특정한 경험과 서사를 공유한다면 그걸 가족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가족이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진 어렵지만, 적어도 '한 지붕 아래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 가족이 아닐까. 이러는 걸 보니,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가의 삶 따위는 절대 살아내지 못하겠다. 혹여나 먼 훗날 아내가 "아이 교육을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어보는 건 어때?"라고 넌지시 말한다면 '기'자를 꺼내자마자 결사 반대의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가를  작정이다.


 서울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경복궁에서)

경복궁 경회루
비 오던 날 경복궁 근정전 앞
경복궁의 밤



(창덕궁에서)

창덕궁의 겨울
창덕궁의 봄
창덕궁의 여름
창덕궁의 가을



(경희궁에서)

경희궁



(창경궁에서)

창경궁 벚꽃과 대온실
창경궁의 밤



(덕수궁에서)

덕수궁 금군 교대식을 기다리며
덕수궁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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