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Mar 08. 2022

왼쪽 입꼬리도 성형되나요

직장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하루는 사무실이 한산했다. 창문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나른한 소리를 내는 타닥타닥 타자와 딸깍딸깍 마우스 클릭음, 오늘따라 잠잠한 사무실 전화기와 팩스기. 종종 이렇게 적요한 금요일 오후를 맞이할 때가 있다. 남은 건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하는 일뿐. 

 

 오후 네 시. 딱히 바쁜 일이 없으니 부장이 티 타임을 가지잔다. 물론 정신없이 바쁠 때도 그놈의 티는 매일 마시기는 한다. 부원들이 한데 모여 커피와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눈다. 이를테면 아이가 학교에서 어땠고, 어제 야구 경기 결과가 어떠했으며, 요즘엔 무슨 영화와 드라마가 인기고, 부동산과 주식과 자동차에 관한 얘기를. 그러던 중 수다스러운 계약직 A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부장님,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별 쓸데없는 물음에 부장은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A형도 B형도 아니야. 내 피는 손 형이야. 손 씨니까"


 일순 1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오는 웃음들. 금요일 오후의 평화를 무참히 깨는 사나운 소리들이었다. 나 역시 아주 웃기다는 표정을 억지로 지으면서, 하도 웃겨서 숨쉬기가 어렵다며 배를 움켜잡는 시늉을 냈다. 나는 그럼 김 씨니까 혈액형이 김 형이네, 김 형. 아하하하. 우스워 죽겠네.


 "부장님, 죄송합니다. 사고 나도 수혈은 못 해 드리겠는걸요. 저는 김 형이라. 아하하하"


 역시나 쓸데없는 말들이 이어지며 억지스러운 웃음꽃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그다음엔 또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더라. 기억났다. 부장은 요즘 부동산 투자에 열심이라고 했다. 자기가 산 땅보다 안 산 땅이 많다고.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부장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경기도 안산에 땅을 샀다니까. 그러니까 안 산 땅이 더 많다, 이 말이야."

 

 이번에는 2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아까보다 늦게,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오는 웃음들. 아아, 이제 이해했어요. 부장님이 하이 개그를 구사하셨네요, 아하하하. 열심히 웃던 중 힐끗 부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입술이 씰룩거리는 게 자신의 유우-머(그러니까 '개그'도 '유머'도 아닌 옛날 옛적 <깔깔 유우머집> 따위에나 나올 법한)에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회의 시간만큼이나 티 타임도 길었다. 아니, 길게 느껴졌다.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들을 들으면서 억지웃음을 짓느라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게 더디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참을 웃는 척하다가 반대편에 걸린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어째서인지 생경했다. 왼쪽 입꼬리는 그대로인데 오른쪽 입꼬리는 한없이 위로 잔뜩 올라가 있다. 눈꼬리에는 만들어 낸 낯선 주름들이 움찔거렸다. 진심으로 웃을 땐 양쪽 입꼬리가 다 올라가지만 억지웃음을 지을 땐 오른쪽 입꼬리만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혹여나 왼쪽에 앉은 누군가가 내 왼쪽 얼굴을 보면 어쩌지. 적이 두려워졌다. 슬쩍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옆에 앉은 C 과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 왼쪽의 J 차장도 역시나 오른쪽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저러다가 어느 날엔 눈과 입이 맞닿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놀랍게도 오른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왼쪽 입꼬리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요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동지애 비슷한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정면에 앉아있는 부장을 쳐다봤다. 양쪽 입꼬리가 모두 다 올라가 있는 모습. 부장 혼자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1시였다.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엑셀을 만지면서 투덜거렸다. 대체 다음 주 월요일에 할 보고 자료를 왜 퇴근 시각 5분 전에 만들라고 지시하는 걸까. 이렇게 야근할 건데 뭐하러 오후에 티 타임 따위나 가지며 노닥거렸나. 직장 생활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럼에도 쌍시옷이나 어린 동물의 이름이 들어간 욕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건 대학생 때나 하는 말이다. 전년 동기 대비 그래프를 만들면서 중얼거렸다. 딸내미가 올해 수능 친다던데 재수나 해라. 원 단위를 억 원 단위로 고치면서 중얼거렸다. 너는 부장까지가 끝이야, 본부장은 어림도 없어. 막대그래프 위 레이블에 숫자를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새 차 뽑았던데 가는 길에 펑크 나라. 보고서도 소원도 저주도, 디테일해야 이해하기 쉽고 이뤄주기도 좋은 법이다.


 마침내 퇴근. 막차가 끊길까 봐 허겁지겁 지하철 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 역내 광고판들이 보였다. 2호선 강남역이라 그런지 열에 일고여덟은 성형외과 광고였다. 새롭게 태어난 미남미녀들이 자신 있게 희고 가지런한 이를 보이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입꼬리를 살펴봤다. 왼쪽 오른쪽 모두 완벽한 대칭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가 있었다.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미소였다. 아니다. 실제로 본 적 있다. 아까 부장이 짓던 미소가 저것과 비슷했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스마트폰에 충전기 케이블을 연결한 듯 반짝. 문득 좋은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다.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도 진심으로 웃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왼쪽 입꼬리 UP 성형'. 취업과 승진의 필수 요건으로 홍보하면 되겠다. 연계 상품으로 '오른쪽 입꼬리는 DOWN 성형'해 줘야지. 하도 억지 웃음을 짓는 바람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 굳어진 직장인도 있을 테니까.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승강장 안전문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분명 오늘 하루 종일 웃긴 했는데 처음으로 왼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다.






 ※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다. 혈액형과 안산 땅 농담은,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실화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런 썩은 개그는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나 역시 후배들 앞에서 무심코 그런 개그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 노동자의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