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고 있던 아이가 별안간 한 손에 핸들 장난감을 쥔다. '삐뽀삐뽀' 구급차와 '애앵애앵' 소방차, 좌회전과 우회전 깜빡이 소리, "건너가는 길을 건널 땐 빨간불 안 돼요, 노란불 안 돼요, 초록불이 돼야죠." 같은 노래가 나오는 핸들이다. 다른 손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오랜 절친인 양 껴안고 자는 강아지 인형 샤샤의 목덜미를 붙잡는다. 양손에 늘 쥐어야 할 걸 쥐고서 소파로 기어 올라간다. 소파 중에서도,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가장 푹신한 곳에 엉덩이를 들이밀어 앉는다. 그리고 집이 떠나가라 힘차게 외친다.
"엉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요즘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 '엉아'. 녀석이 목놓아 부르는 이들은 바로 여섯 살 신우, 네 살 이준이다. 방송인 김나영의 두 아들들이 나오는 유튜브 채널 <노 필터 TV>를 틀어달라는 말. 그 형아들을 처음 만난 건 몇 달 전이었다. 동네 산책을 하던 중 아이는 유모차에 타고 있거나 걸어 다니는 자기 나이대의 아기들을 보고서 헤실거렸다. 친구나 형, 누나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집에 돌아온 뒤 유튜브에서 또래 아기들이 나오는 동영상을 찾아 몇 번 보여 줬더니 또다시 헤실거렸다. 그렇게 몇 번을 보다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의 인도를 받아 마침내 신우와 이준이네까지 닿은 것. 아이는 그 형들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마치 중독이라도 된 양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댄다.
아이가 엉아를 외칠 때마다 TV를 틀어주는 건 아니다. 육아 전문가 오은영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 2세 이전의 아이에게 미디어를 보여주면 안 된다고.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만 2세 미만의 유아에게는 전자기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만 2~4세는 하루 1시간 이상 전자기기 화면을 보지 않도록 권고한다. 미디어의 이른 노출과 오랜 노출은 아이 언어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리모컨을 들기 전에 어떻게든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 진아, 그거 말고 우리 핑크퐁 사운드북 갖고 놀까? 타요랑 로기랑 라니랑 가니 버스 굴리면서 놀까? 칠판에 그림 그리자, 그림. 이거 봐라, 진이 얼굴이다. 우와, 책장에 곰돌이와 토끼와 아기돼지가 나오는 재미있는 그림책이 있네. 이렇게 어떻게든 영상 대신 다른 걸로 꾀어 보려 한다.
하지만 육아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네 번 중에 한 번 꼴로 아이의 의지를 꺾지 못할 때가 온다. 꺼져있는 TV 화면을 삿대질하듯 가리키고, 목에 벌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고,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팔다리를 발악하듯 흔들어대면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러다간 자칫 아이 숨이 넘어가겠다. 별수 없이 나도 소파에 같이 앉는다. 핸드폰으로 유튜브 어플을 켜고 신우 이준이 동영상을 찾아서 TV로 화면을 미러링한다. 아이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어차피 손톱 깎거나 머리 자를 때 핑크퐁이나 타요 영상을 종종 보여 줬잖아. 그에 비하면 사람 형아들의 영상은 중독성이 덜하겠지. 이미 삶은 돼지고기가 뜨거운 물을 무서워하랴. 대신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한다.
"그럼 우리 형아들 영상 딱 두 개만 보는 거야. 알았지? 대답. 진아, 대답해야지."
23개월짜리 아이는 정말 말귀를 알아들은 건지, 성가신 아빠 따위 얼른 조용히 시키고 싶은 건지 곧바로 대답한다. "네ㅡ!" 하고. 아니, 아직 발음이 서툰지라 정확히는 '네'와 '에'의 중간 정도 되는 소리를 낸다. 대답을 마쳤지만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이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서, 가끔은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화면을 바라본다.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표정을 한 채.
영상에 나오는 김나영의 아들들은 엄마와 셋이서도 잘 놀고 둘이서도 서로 잘 논다. 형인 신우는 동생인 이준이를 챙겨준다. 여섯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뜨거운 음식을 후후 불어서 동생에게 주고, 욕실에선 비누칠을 해서 씻겨주고 씻은 후엔바디로션도 발라주고 드라이기도 머리도 말려준다. 침대에서 앞구르기 하는 법도 알려주고, 게임을 할 땐 울며 불며 떼쓰는 동생에게 "이건 되고, 그건 안 되는 거야."라며 엄하게 규칙을 가르친다. 동생은 형을 따라 하며많은 걸 배운다. 그리고 맛있는 걸 형과 나눠 먹고 고마워, 라는 말을 하고 종종 꼭 안아준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엄마가 아니라, 형인 것 같기도 하다.
걔네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혹시 우리 아이가 함께 놀 수 있는 제 또래의 동생을 원하는 걸까. 아빠 엄마 같은 다 큰 어른들만 있는 집에서 홀로 외로운 걸까. 그래서 친구 같은 형아들이 나오는 영상을 매일같이 찾는 게 아닐까 싶었다.나도 어렸을 땐 저런 모습이었으려나.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아직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던 적,나는 집에 사람들이 오면 "가지 마!"라고 외치며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의 대군을 단기필마로 막아낸 장판파의 장비나 스타크래프트에서 좁은 길에 빈틈없이 알박기한 서플라이디폿처럼길목을 막아섰다는데. 제발 더 있다 가라면서, 아니, 그냥 우리집에 계속 같이 있자면서 손님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단다. 그러고 보면 정말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다.
요즘 들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마디씩 한다.
"둘째는 언제 낳을 거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함한다.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어 죽을 판인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차마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양 귀를 막고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다.
"둘째 안 낳을 거예요. 하나만으로도 벅차요. 둘, 셋씩 낳아서 키우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쐐기라도 박듯 한 마디 더 덧붙인다. 언젠가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봤던 표현과 함께다.
"혹시나 나중에 실수할 수도 있으니 조만간에 묶으러 갈 겁니다. 씨 없는 수박이 될 거라고요. 저는 이제부터 생산직이 아니라 '서비스직'이고 싶어요."
이런 대답까지 들으면 웬만한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런가 보다, 한다. 이제 대화의 주제는 둘째가 아니라 본인과 지인의 경험담과 짓궂은 농담으로 이어진다. 실은 나도 몇 년 전에 묶었어. 동방불패처럼 남성을 잃은 거지. 그런데 그거 알아? 묶었다고 100% 안전한 게 아니라니까. J 본부장은 수술받고 안심했다가 덜컥 셋째가 생겼다더라고. 그리고 서비스는 무슨 서비스야? 아직 젊어서 그렇구먼. 더 나이 들어봐. 부부 관계는 연 1회 피할 수 없는 억지 행사 같은 거지, 서비스나 페스티벌 같은 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개중에서 집요한 이들은 거듭 둘째를 권한다. 동물 새끼든 사람 새끼든 어릴 때가 가장 귀엽다면서. 아이 혼자 두면 외로워한다고, 사회성이 제대로 길러지지 않을 거라며. 본인들이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달콤한 사탕 같은 말을 건넨다.
"애들이 둘이서 같이 놀면 육아가 훨씬 편해진다니까.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부모가 같이 놀아줘야 돼. 내 말 한번 믿어 봐."
"아, 정말요?"
"그렇다니까. 김 과장네 애가 아들이지? 아빠가 아침부터 밤까지 몸으로 놀아줘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편해진다'는 단어에 일순 솔깃해졌다. 설렘으로 물든 두 눈을 반짝이며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하지만 이내 아이를 낳고 키웠던 지난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열 달 동안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매사 조심할 것투성이고, 입덧에 속 쓰림에 요통에, 불편함으로밤새 뒤척이는 아내를 보살피던 일. 혹여나 잘못되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던 출산의 순간. 매 시간마다 잠에서 깨 울부짖는 아기를 토닥이고,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다시 재웠지만 금방 깨 버리는 탓에 밤새 잠 못 이루던 날들. 걸음마를 시작하니 다칠세라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것까지. 이런 고됨을 또다시 겪는다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 힘들면 아이 돌보미를 쓰면 된다는데, 코로나19도 그렇고 사람을 믿기 힘든 세산에서 공연히 불안에 떨고 싶진 않다.
그뿐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집은 외벌이를 하니 생기는 걱정. 아이가 키우는 덴 돈이 많이 든다. 욘석은 어떻게 알았는지 철마다 비싼 과일을 찾는다. 딸기, 블루베리, 천혜향, 골드 키위까지. 입맛이 어찌나 고급스러운지 호주산 소고기나 주문 이유식 따위는 몇 번 씹지도 않고 뱉어버리고 1등급 한우와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만을 만족스러워한다. 어느 집은어릴 적부터 영어 유치원을 보낸다는데 한 달에 백만 원이 넘게 든다더라. 국영수뿐 아니라 남들 다 하는 태권도며 피아노며 미술 학원에 보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틈틈이 여행도 다니고 캠핑도 가야 한다던데. 우리가 다달이 아파트 대출 원리금을 갚지 않아도 되면 둘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아이 키우기 힘든 사회 때문이라며 괜히 남 탓도 해 본다.
요즘엔 육아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이가 울고 칭얼거릴 땐 어쩔 줄 몰라했는데 이제는 심상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려니, 하면서 안고 토닥이고 쓰다듬고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준다. 기계 같은 동작과 마음으로 움직여주면 아이는 어느새 잠잠해진다. 아이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잠들어주는 덕에 늦은 밤엔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마침내 생겨난 빈틈에서 아내와 함께 맥주 한 캔과 육포를 즐기거나, 집 앞 홍제천에 나가 밤 산책을 하거나, 찜해놓은 리스트에만 있던 책을 읽고, 넷플릭스나 티빙으로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그동안 송두리째 잃어버린 내 삶을 이제야일부나마 찾은 것. 하지만 다시 갓난아기를 키우게 되면 돌려받은 나의 생활을 반납해야 한다. 아이라는 새로운 삶을 만드는 건 기쁨이지만 내 삶을 더 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다.
우리집에 둘째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진 않았지만 그에 못잖은 비장한 얼굴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김나영은 신우를 첫 번째 아기, 이준이를 마지막 아기라고 부르는데 우리집은 첫째이자 마지막 아기인 진이만 있을 뿐. 혹여나 아이가 동생을 원한다면 강아지를 하나 키울 셈이다. 밤마다 강아지 인형을 껴안고 잠이 드니 살아있는 진짜 강아지도 좋아할 거라 믿는다. 그걸로도 안 되면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있지도 않는 동생 생각일랑 더 이상 하지 않겠지.
그나저나 정작 아이는 "동생 낳아줘." 같은 말을 한 적없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이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