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첫 번째 여행의 둘째 날
둘째 날은 지나치게 일찍 맞이했다. 낯선 잠자리가 숙면을 방해했는지 아이는 이른 때에 일어났다. 풀이라도 칠한 듯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눈꺼풀을 간신히 열어 올린 후 휴대폰을 봤다. 아직 오전 7시도 안 됐다. 평소에 9시 즈음해서 일어나던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모른 척하고서 딱 5분만 더 누워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짧은 게으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뒹굴거리면서 내게 다가오더니만 옷소매를 잡아 끈다. "아빠, 엄마"거리면서 얼른 침대 밖으로 나가잔다. 아들아, 나 좀 살려줘어어.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는 착한 어린이가 아니란다.
1. 제주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아직 남은 졸음을 털어내며 아이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한 빗방울들이 거실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어제 날씨와는 전혀 다르게 오늘은 비가 온다. 그러고 보니 제주에 올 때마다 며칠 중 꼭 하루는 비가 왔다. 여행 날씨운은 없었던 편이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다고, 여행을 망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제주는 그런 곳이었다. 햇볕이 쨍쨍해도, 날이 흐리고 비가 와도, 한라산 높은 곳에서 눈꽃이 내려도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처음으로 제주에 여행 왔을 땐 둘째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때문에 새벽바람부터 바쁘게 움직여 성산일출봉 산마루에 올랐지만 동틀 녘의 해를 보지 못했다. 두 번째 여행 땐 전날 밤부터 이어진 비바람으로 파도가 거세진 탓에 용머리해안 입구에선 출입금지 팻말과 맞닥뜨렸다. 세 번째 여행 땐 저녁을 먹을 때 즈음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불과 10여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저히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 당초 계획했던 맛집으로 가는 건 포기했다.
그럼에도. 첫 번째 여행의 성산일출봉에서는 근처 스타벅스에서 제주에서만 파는 음료를 마시고 기분이 나아졌다. 가랑비에 젖은 몸을 말리려고 들어간 곳이었는데 뭍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한라봉차와 첫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 두 번째 여행의 용머리해안은 금방 출입금지가 풀려서 걸어볼 수 있었다. 뙤약볕에서 걷는 것보다 구름 낀 하늘 아래서 걷는 게 수월해서 오히려 더 나았다. 날이 흐렸던 덕분에 다음 일정의 오름에서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상쾌하게 걸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여행의 저녁 식사는 비 때문에 숙소 바로 앞 고깃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흑돼지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어서 뜻밖에도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운전대를 잡지 않으니 한라산 소주 한 잔도 곁들일 수 있어서 밥맛이 더 좋았다.
그러니까. 비가 오더라도 제주는 그만의 정취가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제주라서 꼭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 여행객은 마음이 너그러워져 있는 상태라 햇살이 좋든 비가 내리든 바람이 불든, 그렇게 날씨가 어떻든지간에 나름의 정취를 느끼는 게 아닐까도 싶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니 비가 그쳤다. 하늘색이 먹빛에서 바닷빛으로 바뀌었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이렇듯 제주 날씨는 아주 변덕쟁이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 아이와 함께 공놀이를 하며 가볍게 몸을 풀고, 두 번째 날의 여정에 나섰다.
2. 새로움을 경험해야만 진짜 여행인 걸까
오전에는 비자림을 걷기로 했다. 예전에 한 번 와 본 적 있는 곳이다. 날을 세어 보니 그때가 벌써 7년 전이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낯선 곳으로 가는 것, 생경한 사람과 사물을 접하는 것, 전에 없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인데. 이미 갔던 곳에 또 가는 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가 봤던 곳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보게 되면 그 또한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을 먼저 먹고 걷기로 했다. 별생각 없이 비자림 입구에 자리 잡은 식당인 '비자림국수'에 들렀는데 의외의 맛집이었다. 이곳 음식이 아이 입맛에도 맞았나 보다. 정신없이 국수와 전병을 손으로 집어 먹는다. 아이는 분명 숟가락과 포크를 잘 썼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퇴보했다. 자꾸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려고 한다. 인간의 발달, 인류의 발전은 늘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후진하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나저나 한참 먹다 보니 여긴 제주 맛집이라기보단 강원도 어느 식당에 온 듯했다. 제주에서 으레 먹기 마련인 고기국수와 돔베고기가 아닌, 메밀전병과 메밀국수를 먹어서 그런가 보다. 제주에서 맛보는 강원도의 맛이라니, 이거 왠지 색다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휴대폰을 들어서 제주 메밀을 검색해 봤더니, 내가 아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메밀, 하면 으레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과 강원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국내 메밀 생산량과 재배면적 1위는 제주도란다. 강원도의 메밀 생산량은 제주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잘못 알고 있었을 게다. 이게 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시험에도 계속해서 등장했던 그놈의 소설 때문이다. 제주에서 메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왠지 작가인 이효석을 퍽 싫어할 것 같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비자림으로 들어섰다. 비에 젖은 풀 냄새가 기분 좋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내음. 물에 젖은 나뭇잎들은 색이 짙어져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갈맷빛으로 물드는 느낌이 들었다. 비 온 뒤의 숲은 이런 맛이 있다. 아이는 피톤치드를 가득 충전해서 기운이 넘치는지 신나게 달렸다. 그리고 이내 방전돼서 안아 달라고 칭얼거렸다.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이제 다른 데로 가잔다. 비자림을 절반도 채 못 돌았는데 나와야만 했다. 계속 안고 다녔더니 팔이 빠지는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모차를 빌릴 걸, 하고 후회했다.
3. 우리 아이를 예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짧은 비자림 산책을 마치고 보롬왓으로 왔다. 제주 날씨는 누가 변덕쟁이가 아니랄까 봐 금세 다시 흐려졌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보롬왓의 뜻이 '바람 부는 밭'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너른 꽃밭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통유리창이 있는 카페로 피신했다. 카페에서 우리는 따뜻한 차를, 아이는 제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만히 앉아있기에 좀이 쑤셨는지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끌었다. 바깥으로 나가야 할 때다. 아이 손을 잡고 둘이서 꽃밭으로 향했다. 아이는 걷던 중에, 카페 안에 앉아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엄마 얼굴이 좋았는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춤을 췄다. 양팔을 마구 휘젓고, 무릎을 굽혔다가 세웠다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고 난리다. 라디오에서 위켄드의 음악이 흘러나오거나 TV에서 BTS 형아들이 나올 때마다 춤을 추던, 흥이 많은 아이다웠다.
꽃밭을 걷고 카페로 돌아왔다. 아내는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창 밖에서 아이가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기만 본 게 아니라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손님들이 다 봤다고. 이내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한다. 쟤 너무 귀엽다, 쪼그만 게 어쩜 저렇게 춤을 추냐, 같은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단다. 그 얘기를 듣고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이 손에 꼭 쥔 풍선처럼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행복감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는 나에 대한 찬사나 동경보다 나의 아이에 대한 칭찬이 더 기쁘다. 재테크고 승진이고 유명세고 다 필요 없고 아이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속에 가득하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거였다.
4. 천혜향 호구당할 뻔 한 이야기
둘째 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운전하며 곁눈질로 좌우를 흘끗거리니 감귤이니 천혜향이니 한라봉이니 하는 과일을 파는 직판장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마켓컬리나 쓱 배송, 대형마트나 과일가게에서 사던 제주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여행을 왔으니 현지의 날것 그대로의 맛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숙소 근처 적당한 가게 옆에 차를 세웠다. 왠지 무료해 보이는 얼굴을 한 사장 아주머니께 만 얼마를 주고 천혜향 한 박스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서 박스를 뜯고 천혜향 하나를 까먹었다. 으음,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맛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불쾌한 쓴맛과 신맛이 뒤섞여 이어졌다. 이건 뭐랄까, 언젠가 먹어 본 맛인데.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 살았다.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 역시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옷과 양말은 아무 데나 던져놓기 일쑤고, 먹다 남은 치킨이나 음료수 따위는 책상 저편이나 창가 구석이 제자리였다. 나는 숙취 해소를 위해 오렌지 주스를 자주 마셨는데, 절반쯤 남은 페트병은 역시나 창가에 두곤 했다. 남은 걸 다음날에도 마시고 그다음 날에도 마셨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며칠 뒤에 또 마셨다가 우웩, 하고 뱉어냈다. 쓰고 신 것이 마치 술맛 같았다. 냉장고에 넣지 않아서 그새 상했던 것. 직판장에서 사 온 천혜향에서는 그때 그 맛이 났다.
화가 나서 당장 박스를 차에 싣고 가게로 되돌아갔다. 이것 맛 좀 보세요, 상한 걸 팔아서야 되겠습니까, 당장 환불해 주세요. 여행 기분을 망치지 않게 최대한 화를 참으면서 따졌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초로의 아주머니는 내 말을 한참이나 들었다.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이미 까 놓은 천혜향 한 알을 맛봤다. 그리고 이게 뭐가 문제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 사람이라 그런지 천혜향 맛을 모르는가 봐."
이번 여행에서, 아니, 그동안의 몇 차례의 제주 여행에서 들었던 말들 중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 그래도 큰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건 결국 일부 환불은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기 전 동문시장에 들러 천혜향 한 박스를 샀다. 시식용으로 늘어놓은 천혜향을 하나 집어 먹었다. 내가 익히 알던 맛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혹시나 내가 정말로 천혜향 맛을 모르나 싶어서 잠시나마 혼란하던 참이었더랬다.
5. 여행지에서는 현지인들이 많은 식당을 가야 한댔다
각지를 대표하는 유명한 음식들은 많다. 이를테면 강릉에서는 교동짬뽕, 군산에서는 물짜장, 전주에서는 비빔밥, 담양에서는 죽순무침, 횡성에서는 한우, 춘천에서는 닭갈비와 막국수, 천안에서는 호두과자, 포항에서는 과메기, 통영에서는 충무김밥, 수원에서는 왕갈비, 부산에서는 밀면과 돼지국밥 등등. 제주에서는 역시나 고기국수와 돔베고기를 먹어줘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여행할 때 맛있는 현지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이번에는 과연 맛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어제저녁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심 끝에 고른 곳은 돔베고기로 유명한 '천짓골식당'이었다.
주차장이 따로 없어서 인근 공영주차장에 간신히 차를 댔다. 식당에 들어서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분명 한국말인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 제주도 방언이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행객보다 현지인들이 많은 곳이야말로 맛집이지. 기대한 만큼 흑돼지 수육은 참으로 맛났다. 혀만 즐거웠던 게 아니라 눈도 즐거웠다. 나무 도마에 수육 한 덩이가 통째 나오길래 이걸 어떻게 먹나, 했는데 셰프 레이먼 킴처럼 검은 장갑을 낀 안주인께서 나타나서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슥슥 썰어주신다.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쫄깃한 맛을 원하면 요걸로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면 저걸로, 상냥하게 설명도 해 주시면서. 말투에서는 돔베고기 외길 장인의 자부심이 슬몃 느껴졌다.
현지인들이 많은 곳은 맛집이다. 얼추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그렇다면 현지인이 소개해 준 곳도 맛집일까. 예전에 제주에서 살다 온 친구가 가르쳐 준 횟집이 생각난다. 이곳 출신이 알려준 곳이니 대단한 맛집이겠지. 기대하고 갔지만 이게 웬걸, 영 별로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누군가 내 고향 진주의 맛집을 추천해 달라면 나는 어떤 가게를 알려주려나. 진주냉면이 유명하다지만 실은 서른 살이 넘어서야 맛봤고, 요사이에 SNS에서 유명해진 수복빵집의 찐빵과 단팥죽은 썩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던 터였다. 여행객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론이 다소 이상한데, 지방 출신들한테 현지 맛집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 입맛이 다 다르다. 여행지의 맛집 고르기는 복불복의 재미에 맡겨두시라.
길었던 하루의 마무리. 짠! 우리는 맥주와 막걸리, 아이는 과일 주스. 언젠가는 아이의 손에도 술잔이 들려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