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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n 15. 2023

대불광천시대가 온다

정말 온다니까요. 이 사람, 믿어 주세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불광천이라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지명이었다. '불광동 휘발유'니 '연신내 피발바닥' 같은 예스러운 별명들 따위에서나 얼핏 들어봤을까. 본래 서울에 살던 사람이 아닌지라 불광동이라는 동네가 어딘지도 몰랐더랬다. 불광천은 모르더라도 매봉역 앞에 위치했던 양재천은 알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산책하러 나가곤 했던 곳. 가수 요조의 노랫말 중 주성치가 중랑천에서 무술 연습을 했다는 중랑천 역시 가 본 적은 없지만 들어는 봤다. 아내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로 가는 길에 있던 안양천도, 봄엔 나름 벚꽃 명소라는 소문과 함께 익히 알고 있었다. 둘이서 연애할 때 부암동과 홍지문 인근을 걸으면서 홍제천을 마주했던 추억도 남아 있다. 그렇게 한강의 지류인 ‘OO천’들을 수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불광천이라는 건 기억의 페이지 어느 한 구석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평생 그 존재를 모르고 살던 불광천은 6년 전 겨울 응암동으로 이사 오면서 처음으로 만났다.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강남에 자리 잡은 덕분인지 늘 단정하게 정비되어 있던 양재천과는 달리 하나같이 볼품이 없었다.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불광천의 오가는 길은 맞은편에 사람이 보이면 어깨를 수그려야 할 만큼 비좁았고, 제대로 된 조명도 없어서 밤엔 사위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했다. 하천에서는 한여름이 아닐 때도 퀴퀴한 냄새가 올라와서 절로 인상을 쓰게 됐다. 천변을 걷는 사람들의 면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다 영감님인 데다가, 개중에는 근처 감잣국집이나 순댓국집에서 한잔 걸친 후 불콰해진 얼굴들이 태반이었다. 아내와 산책을 하며 생각했다. 빚을 좀 더 내서 마포나 용산에다 집을 얻었어야 했나. 때늦은 후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광천의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봄이 되자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벚꽃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며 피어올랐다. 불광천 끝에서부터 한강까지, 고운 빛의 꽃잎들이 천변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여의도 윤중로나 잠실 석촌호수가 부럽지 않은 풍경이었다. 당시 여권의 실세였던 박OO 의원의 지역구여서 그랬을까. 불광천은 몇 해에 걸친 정비 끝에 길도 넓어지고, 물빛도 깨끗해지고, 주변 시설도 그럴듯해졌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어느덧 정겨워졌다. 대형 거울이 붙어있는 굴다리 아래에서는 밤마다 아주머니들이 단체로 모여서 에어로빅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며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아주머니들이 없는 날엔 교복을 입은 미래의 케이팝스타들이 춤 연습을 했는데 그 모습도 구경하기에 퍽 재미났다. 다른 굴다리 아래에서는 어르신들이 바둑을 두셨다. 곁을 지나가면서 흘끗거렸는데 진지한 얼굴들을 따라서 나 역시 절로 심각한 표정을 짓곤 했다.


 무엇보다 불광천을 따라 늘어선 맛집들의 매력도 알게 됐다. 초밥집, 치킨집, 라멘집, 감잣국집, 돼지갈빗집들까지. 걸으면서 도저히 한잔 걸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곳들로 가득했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던, 새로 들어선 카페를 보면서는 생각했다. 이제 불광천에도 젊은이들한테 먹힐 만한 힙한 가게들이 들어서는구먼. 실은 소위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홍대니 연남동이니 하는 곳에서 밀려나서 여기까지 온 것일 테지만. 여하튼 이렇게 멋진 곳들이 늘어나면 불광천의 주가도 점점 오를 테고 우리 동네가 더 살 만한 곳이 되겠다. 이른바 ‘대불광천시대’가 올 거라며 희망에 부풀었다. 연예인 샘 해밍턴은 그 시대를 보지 못하고 응암동을 떠나 연희동으로 이사 갔지만, 나는 그 역사적인 순간을 내 두 눈으로 목격하고 역사의 증인으로 남겠다, 다짐했다. 여담이지만, 몇 년 전까지 응암동에 살았던 샘 해밍턴도 동네에 대한 애정이 있었는지 불광천을 비롯해서 응암시장, 대림시장 등지의 식당들에 들르면 열이면 여섯 일곱 집에서는 그의 사진과 사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덧없는 약속은 금방 허물어지고 말았다. 아이가 생기자 지금 사는 동네인 북가좌동으로 이사 올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가족들이 사는 곳 근처. 둘만으로는 아이를 키우기 힘드니 거들 손이 하나라도 더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아쉬움을 남긴 채 불광천을 떠났지만 한 번 이어졌던 연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걸어서 10여분이면 불광천을 만날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반대 방향으로 걸어서 10여분이면 이제 불광천 뿐 아니라 홍제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나름 한강 ‘천세권’이라 이르면 되겠다. 서울 아파트값의 새로운 기준, 역세권도 숲세권도 산세권도 한강뷰권도 아닌 바로 천세권입니다, 라고 외치고 다닐 요량이다. 새로운 동네에 발을 딛자마자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어쩌면 나는 살고 있는 동네와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인가 보다. 이곳에서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보고 듣고 웃고 먹고 마시며 삶이 켜켜이 쌓여갈 게다.


 그나저나 불광천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듯하다. 곧 올 것 같았던 대불광천시대는 아직일까. 몇 년만 더 기다려 봐야겠다.




+ 덧 : 즐겨 갔던 불광천변 맛집들

1. PLOP : 피자와 맥주 (서울 은평구 불광천길 338 1층)

2. 로라 : 파스타와 브루스케타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32길 23-8 1층)

3. 수국쌀복 : 쌀국수와 돼지덮밥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 258)

4. 근린커피 : 힙한 커피 (서울 은평구 응암로21길 23)

5. 벙구갈비 : 양념 돼지갈비 (서울 은평구 응암로 269)

6. 원조은평감자국 : 응암동의 무수한 감잣국집들 중 하나 (서울 은평구 응암로 287)

7. 마마수교 : 만두와 산동식 짜장면 (서울 은평구 증산로 397)

8. 네마커피 : 프릳츠 출신들이 만드는 커피 (서울 서대문구 거북골로 208-1)

9. 차이몬스터 : 유명 셰프의 중식 (서울 은평구 불광천길 334 와산교 바로 앞 빨간지붕)

10. 옥토끼제면소 : 일본식 라멘 (서울 은평구 불광천길 536 애필리움아파트)




불광천의 벚꽃



PLOP


로라


수국쌀복


근린커피


벙구갈비


원조은평감자국


마마수교


네마커피


차이몬스터


옥토끼제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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