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Dec 24. 2024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우리가 지난여름에 먹은 것들 (4) : 뷔페 외 이것저것

1. 뷔페


 토요일 점심. 가족들과 집 근처 뷔페 '애슐리퀸즈'에 가서 밥을 먹었다. 


 요리와 설거지 걱정 따위 없이 몇 접시를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하얗고 두툼한 손이 나타났다. 그 손은 냅다 아이의 손을 붙들었다. 아이는 별안간 벌어진 일에 일순 몸이 굳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무서워, 하면서. 깜짝 놀랐던 나는 아이 손을 감싸 안고 고개를 들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눌한 말투로 귀여워, 아가야, 하면서 악수하듯 손을 잡고 흔들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듯했다. 별일 아님을 알고 긴장을 풀었다. 아이에게 말했다. "진아, 이 형아 네가 너무 귀여워서 인사하러 온 거야. 놀라지 마." 뒤이어 청년의 아버지로 보이는 초로의 사내가 달려왔다. 우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이에게도 미안하다 했다. 잠깐의 소동이 끝나고 그들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며 아까 그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빠 엄마가 놀란 만큼 진이도 놀랐지? 그런데 그런 형아 누나들도 있어. 이상항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야.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다른 사람들하고 그냥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야." 

 아내도 아이에게 말했다. 아직도 놀란 빛이 가시지 않은 아이를 더 달랜 후 아내에게 말했다. 

 "근데 그 아저씨는 진짜 힘들겠다. 평생 자식을 돌보면서 살아야 되잖아." 

 "자식보다는 오래 살아야 할 텐데... 먼저 가면 누가 돌봐?" 

  아내도 내 말에 동감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자폐 같은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평균 기대수명이 짧대."

 내가 뱉은 말에 내가 놀랐다. 나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걸 어째서 다행이라고 말한 걸까.


 돌이켜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 있다. 여느 때처럼 육퇴 후 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맞은편에서는 네댓 명 정도,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꽤나 키가 큰 아들, 아직 꼬마 아이인 딸, 그리고 삼촌인지 누구인지 모를 남자도 한 명 더. 조곤조곤, 때로는 왁자지껄, 가끔 다 같이 크게 웃기도 하고. 아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팔다리를 크게 휘저었다.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얼핏 봐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네들 곁을 별생각 없이 지나가려던 중.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흠칫 놀라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키가 큰 아들을 서둘러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들이 내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어깨동무하는 것처럼 팔을 단단히 둘렀다. 혹은 내가 아들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도 보였다. 입을 꾹 닫고 얼른 내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기색. 갑작스러운 무거운 침묵이 나와 그들을 짓눌렀다. 마침 거리에는 우리밖에 없고 때마침 지나가는 차 한 대, 길고양이 한 마리도 없어서 유난히 적막했다. 


 졸지에 유해조수 취급을 받게 된지라 불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지나가며 아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난 뒤에야 알았다. 웃는 입은 많이 벌어졌고 눈동자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짐작컨대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인 듯했다. 문득 영화 <말아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발달장애가 있는 주인공 초원은 얼룩말 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의 엉덩이를 만진다. 그저 얼룩말을 좋아해서였다. 여자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 옆에 있던 남자 친구는 초원을 때린다. 돌아온 엄마는 아이가 맞는 장면을 보며 울부짖는다. 난리통 속에서 초원은 사람들을 향해 엄마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말을 크게 외친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그들은 어느새 저만치로 멀어지고 있었다. 지나간 아버지의 능숙한 움직임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일련의 동작과 침묵과 경계와 피신이 빈틈없이 이어지던 모습. 그동안 얼마나 이런 일을 많이 겪었기에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그때 분명 보았다. 장애가 있는 아들이, 혹여나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까 봐, 또는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을까 봐 끌어당기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짙은 그늘을.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을 수 있었다. 






2. 투게더


 근래 핫하다는 서순라길. 그곳에서 그나마 사람이 덜 붐볐던 '사운즈포레스트'라는 리스닝 펍 겸 카페에 들렀다. 한갓진 곳에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더위를 식힐 겸 시원한 걸 먹어볼까. 메뉴판을 보니 바닐라 아이스크림+꿀+후추 조합의 낯선 음식이 있길래 시켜봤다. 단어들의 조합만 봤는데도 맛이 절로 상상되면서 침이 흘렀다. 한 입 떠먹어 보니 맛은 익히 상상했던 그 맛이었다. 최근에 인터넷에서도 이와 비슷한 레시피를 본 적 있다. 투게더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후추를 톡톡 쳐서 먹으면 그것 참 별미라고 했다. 이탈리아 어느 노천카페에서 먹어봄 직한 이국의 맛이 느껴진다고. 


 더위가 사나운 것이 투게더 먹기 좋은 날씨다. 여름에는 선풍기 앞에 가족들이 둘러 모여 투게더 뚜껑을 열고 각자 숟가락으로 돌아가며 퍼 먹어야 한다. 선풍기는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회전해야 제맛이고. 너무 천천히, 오래 먹다 보면 더위 탓에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바닐라물이 돼버리니 적당한 빠르기의 숟가락질도 필요하다. 투게더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도 생각난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와 심은하가 둘이서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장면.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씬이다. 어디서 듣기로는 그게 투게더는 아니고 유사 제품이었다고 하는데 뭐든 어떠랴. 스테이플러를 '호치키스'로, 인라인스케이트를 '롤러블레이드'로 부르는 것처럼 통에 든 바닐라 아이스크림 이름은 대충 '투게더'라 퉁쳐 부르기로 하자.


 서순라길 산책으로부터 며칠 후.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아빠'라는 가게다. 아이가 아빠 좋아, 너무 좋아, 이런 말을 하길래 아비로서 뿌듯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스크림에 빠진 날'을 줄인 말인 아빠가 좋다는 뜻이어서 실망감을 안겨줬던 곳이다. 냉동고에 보니 투게더가 보이길래 하나 사 왔다. 하겐다즈나 서주같은 다른 거 말고 진짜 '투게더'였다. 이번에는 인터넷에서 읽었던 레시피대로 올리브유를 두르고 후추를 톡톡 뿌렸다. 같이 먹은 아내도 아내의 고모님도 아내의 할머님도 의외로 맛있다는 반응이었다. 이게 바로 <흑백요리사> 열심히 봤던 사람의 손맛입니다, 으쓱. 어깨가 한 뼘 정도 치솟았다. 하지만 아이는 한 입 맛보더니 으음, 이게 무슨 맛이야, 하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진아, 우리는 투게더를 투게더해서 먹은 거야." 

 먹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투게더'가 뭐냐면은 '같이'를 ABC로 말한 거라고. 아이에게 투게더의 뜻을 한참이나 설명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투게더, 같이 먹으니까 좋지? 맛있지? 식구라는 건 이렇게 같이 무언가를 나눠 먹는 사이인 거야." 

 아이는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부터는 올리브유 뿌리지 말고 그냥 줘." 






3. 맘모스빵


 회사 앞에 '안스베이커리' 분점이 하나 있다. 소위 전국 몇 대 빵집이니 몇 호 제과 명장의 집이니 하며 순위를 매길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빵집이다. 맛있는 빵들이 많음에도 여기서 가장 많이 먹은 건 맘모스빵이다. 겉은 소보루빵인데 안에 팥과 크림과 잼까지 들어있는, 왠지 어르신들이 좋아할 것 같은 빵이다. 종종 밥을 같이 먹는 동기 M형, Y형, L형, K형과 나, 이렇게 네댓은 점심을 먹고 꼭 이곳에 와서 맘모스빵과 커피를 시킨다. Y형은 이걸 '맘모스 정식'이라 이름 붙였다. 분명 배부르게 밥을 먹었건만 이상하게도 맘모스빵이 들어갈 배는 또 남아있다. 


 맘모스빵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이게 왜 아재스러운 빵이라고 부를까. 비교적 값이 싸고, 양이 많고, 소보루나 팥 같은 전통의 재료들이 들어가고, 달달한 맛이 나고, 못생겨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아재스럽지 않은 빵이란 무엇인가. 무릇 쬐끄마한 것이 값은 엄청 비싸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재료들이 종종 들어가고, 건강하다지만 맹숭맹숭한 맛에, 무엇보다 사진 찍기에 고운 자태를 지녀야 한다. 그렇다. 인스타그램에서 볼 법한 예쁜 빵이야말로 아재스럽지 않은 요즈음의 빵인 것. 


 빵을 먹으면서 아재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을 해 봤다. 확실한 건 이걸 매번 먹고 있는 우리들은 다들 아재라는 사실이다.






4. 홍콩식 커피


 선배 J, 후배 K와 함께 일산에서 점심을 먹고 근사한 카페를 다녀왔다. '청킹에쏘'라는 이름의 가게였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싶었는데 홍콩 영화 <중경삼림>을 모티브로 한 곳이라고 했다. 아아, 어쩐지. 나도 홍콩 여행 갔을 때 중경삼림에서 임청하가 금빛 가발을 쓰고 뛰어다니던 그 건물, 청킹맨션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지하에 위치한 '란퐁유엔'에서 토스트와 밀크티를 마셨던가.


 카페는 콘셉트가 확실했다.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영화에서 금성무가 되뇌던 대사인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에서 따왔는지 '10 thousand years'라는 네온사인도 카운터 뒤쪽 벽에 붙어 있다. 오래돼 보이는 공중전화 부스도 카페 입구 문에 달려있고, 홍콩 영화 포스터들로 장식한 벽이며, 비디오테이프와 구형 브라운관 TV, 파인애플 통조림을 비롯한 그 시절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소품들 따위가 시선을 붙들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선배 J와 함께 예전 홍콩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했다. 양조위와 장국영과 금성무와 주성치, 청킹 맨션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와 가스등 계단과 빅토리아 피크의 야경들까지. 둘 다 취향이 비슷했는지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나보다 대여섯 살 적은 후배 K는 이게 대체 뭔 소린지, 하는 눈빛으로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J 선배가 말했다. "아, K는 홍콩 영화는 잘 모르겠구나. 마블의 <어벤저스> 세대라고 해야 하나?" K는 멋쩍게 대답했다. "그래도 에스컬레이터 타고 가는 장면은 여기저기서 많이 나와서 본 적은 있어요."


 나는 장국영을 비롯한 그 시절 홍콩 영화도 좋아하고 아이언맨을 필두로 한 어벤저스도 좋아한다. 그럼 나는 무슨 세대라고 불려져야 할까? 문득 이편도 저편도 아닌 곳 그 사이 어딘가에 끼어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