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Feb 09. 2020

서울에 아파트가 이렇게나 많은데

응암동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던 때, 노을 지던 하늘의 크레인들

Nikon FG-20

Zoom-NIKORR 35~70mm 1:3.3~4.5 Lens

Fujicolor C200 film

2017년 1~2



재개발 공사가 모두 끝난 응암동 백련산의 아파트 단지

Canon QL17 g3

Canon 40mm 1:1.7 lens

Kodak Colorplus 200 film

2019년 1




1.

 "저는 응암동에 살아요."


 대체 응암동이 어디야, 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부연 설명에 들어간다. 3호선 불광역 아시죠, 구파발 갈 때 지나가는 불광 앞의 역이 녹번역이구요, 거기서 내려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돼요. 은평구예요, 은평구 응암동.  맞다, 그거, 감자탕 유명한 동네. 거기 들어보셨죠.


 은평구 에서 제법 오래 사셨던 분내 대답을 듣고 다소 놀 반응이다.

 

 "그 동네, 아무것도 없는 산동네인데? 네가 거기 산다고?"


 그분들께 현재 응암동의 모습을 알려드리고 나면 말 그대로 상전벽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 예전의 이 동네가 어떠했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옛날 옛적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 이곳은 백련산 기슭 고지대에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야말로 드라마 <서울의 달>에 나오던 달동네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곳이 갑자기 재개발이 되면서 힐스테이트니 자이니 아이파크니 하는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변했다는 거다. 이 동네 토박이가 아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역사였다.


 3년 전 여기로 이사 왔을 때에도 여기저기에 아파트를 짓느라고 난리통이 벌어져 있었다. 거실 창 밖으로는 집 앞에서 매일같이 커다란 크레인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봐야 했다. 그나마 늦은 밤이나 일요일에는 공사를 쉬는지라 살기에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첫 만남 때는 철골 뼈대만 서 있던 것에 콘크리트 살이 덧씌워지고 한 층 두 층 차례로 키가 커지더니 어느샌가 아파트 한 채가 뚝딱 하고 만들어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이 동네에수많은 아파트들이 세워졌다. 거대한 규모의 아파트 대단지가 이뤄진 거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으면서도, 이게 꿈이야 생시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는 높은 아파트 지붕들이 시선을 가득 채우는 거실 창 밖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서울엔 이렇게나 아파트가 많은데 왜 다들 내 한 몸 편히 뉘일 집 한 채 가지는 게 그렇게나 어려. 웬만한 직장인 월급으로는 평생 벌어도 한 채 사는 게 힘들 만큼, 값은 왜 이리도 비싼 걸까.


 그나마 나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일찌감치 아파트를 사야겠다는 큰 결심을 했고(실은 아내의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다행히도 지난 정부에서 빚을 내 집을 사라면서 종용했던 탓에(혹은 덕분에) 좋은 조건으로 대출이 가능했고, 아직 집값이 미친 듯이 오르기 직전에(그야말로 천운이었다고밖에) 가까스로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가 주택 소유자가 되어서 그저 기쁘지만은 않았다. 내 집 한 채를 가지기 위해서 수억 원에 달하는 대출을 무려 30년간 매달 갚아야 하니까. 앞으로 1년에 열두 번, 총 360회라는 빚 독촉을 견뎌내야 한다.


 "김OO님, 총 360회 중 1회분 OOO원을 상환했습니다." 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말 그대로 눈 앞이 캄캄했다. 저걸 대체 언제 다 갚을 수 있는 거지. 정년퇴직 때까지 다닌다 해도 회사를 30년을 못 다니는데. 아득한 세월이다.



2.

 그저 스무 살을 넘겼다고 해서, 법적 나이를 채웠다고 해서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음을 느낀 건 처음으로 혼자 은행에 가서 '전세자금 대출'을 받았던 때였다. 죄지은 사람도 아니면서 쭈뼛거리면서 신분증과 내 소득을 증명하는 이런저런 서류를 내밀고, 또 다른 이런저런 서류에 정신없이 사인을 하고, 금리를 우대해 준다는 말에 난생처음 듣는 이런저런 적금이니 카드니 하는 것들을 새로 만든 후에야 간신히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은행에서 상담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진 빚은 이제부터 오롯이 내가 번 돈으로 갚아나가야 한다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들판에 나 홀로 서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도 누구도 신경 써 주지도 않는다이제야 누군가의 품을 벗어나 단독자로서의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은행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소년인 양 살아왔었는데, 대출 창구에 앉아서 불과 십여 분을 보내고 난 후 갑자기 다 커버린 어른이 되었다. 왠지 흰 머리가 한 가닥 돋아난 느낌이 들었다.


 그저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저마다 어른이 되는 순간은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가족을 잃거나, 혹은 첫 경험 후의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나 첫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었을 때, 19금 영화를 극장에서 당당하게 볼 수 있을 때, 갑작스레 가장이 되어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거나,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등등. 각기 다양한 순간들에서 자신이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할 테다. 나는 스무 살을 한참이나 넘기고 대학 졸업을 거쳐 직장인이 된 지도 몇 년이 지나 거의 서른이 다 되어서야, '빚이 생겨나며' 어른이 되었음을 느꼈. 성인식을 유예했던 기간이 무척 길었던 셈이다. 고작 은행 대출이 뭐라고 새삼스레 나이듦을 깨닫게 하나.


 그때부터였을까. 대출금액에 적혀있던 숫자 0의 개수만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감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0 하나의 무게가 이렇게나 무거운 줄 몰랐다. 왠지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시큰하고 주름살과 흰 머리 몇 개가 생긴 듯하다. 대출이 생기기 전엔 겪은 바 없는 증상이었다.



3.

 그 새 나이를 너무 먹었나. 요즈음엔 대출이니 집값이니 하는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근에는 회사 동료들이든 친구들이든 가족들을 만나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열을 올려하는 이야기는 죄다 '부동산' 이야기뿐이라서 그렇다.


 "임 부장님은 대치동 은마 아파트 전세 놓고 있다던데. 거기 재건축만 확정되면 장난 아닐 텐데. 요새도 호가가 20억씩 하려나. 재건축 승인이 나긴 나는거여 뭐여."

 "류 부장이 더 대박이지. 은마에다가 양재 상가에 잠실에도 아파트 하나 분양받은 거 있다던데."

 "제 친구가 익선동 초기에 투자해서 식당을 열었는데 거기 완전 핫해져서 돈 엄청 벌었잖아요. 나도 건물만 있으면 회사 때려치우고 카페 같은 거나 하나 하고 싶다."

 "느그 사촌 누나는 노원에 집을 샀는데 이번에 또 한 채 더 샀다더라. 둘 다 전세 놓고 이번에 아파트를 하나  산다던데. 니는 뭐하노? 월급만 갖꼬 되것나. 돈 벌라믄 부동산이제."

 "야야, 어디서 대출 좀 싸게 못 받냐. X발, 남들 다 아파트 사는데 나도 하나 사야 될 것 같은데. 부동산은 불패라고 불패. 어찌 됐든 나중에 오를 거 아냐."

 "이번 정부가 미쳤나. 이번 정책은 집 없는 사람은 계속 없는 채로 살라는 거야 뭐야. 이러니까 핵심 지지층인 30대 지지율이 떨어지지. 나도 확 태극기 하나 사서 주말에 광화문 집회나 나가버릴까 보다."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또 아파트 이야기. 어느 날은 문득 지겨워졌다.


 "우리, 오늘은 부동산 주제에서 벗어나 볼까요?"


 다들 얼굴의 그늘이 다소 옅어졌다. 그렇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 제발. 취미 생활 얘기 해 보죠. 요즘에 동남아나 제주도 한 달 살이 이런 거 재밌어 보이던데. 는 요즘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거에 재미 들렸어요. 애들하고 보드게임 해 봤는데 그것도 괜찮고. 레고 어때요, 어른들도 많이 하던데. 운동도 좀 해야죠. 맞다, 운동. 회사에 수영하는 분들 꽤 있던데. 과장님 연세 땐 이제 골프도 좀 치셔야 되는 거 아녜요. 


 골프 취미 이야기까지로 이어졌는데. 분명. 우리는 지겨운 아파트 이야기에서 벗어나 삶의 재미라는 것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런데 우리 아파트엔 헬스장 옆에 골프연습장이 있더라구요. 여긴 관리비에 헬스장 이용료가 포함돼 있어서 안 가면 손해예요. 맞아, 요즘 아파트들은 그렇게 운영하더라. 그래서 동네 아파트값은 좀 어때. 좀 오르긴 했어? 상암 쪽도 많이 올랐잖아. 여긴 어쨌든 간에 오르긴 오를 거예요. 서울시가 여길 내버려 두진 않을 거라니까. 큰 쇼핑몰도 하나 들어올 거고, 랜드마크라고 뭐 하나 세울 계획이 있다던데요. 잘 됐네. 집값 좀 오르겠는데 거기.


 우리는 돌고 돌아 결국 또 아파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구멍 같이 헤어 나올 수 없는 부동산늪이다. 다들 얼마나 현재와 미래의 삶이 불안하길래 이렇게나 지금의 집값에 매달리게 되는 걸까. 그마저도 이제는 너무 비싸서 살 수도 없는 신기루 같은, 사고 싶어도 빚조차 낼 수 없는 것을 말이다. 울에 아파트가 이렇게나 많은데. 이게 과연 정상적인 건가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