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Apr 18. 2020

기왕 사는 집이니까 예쁘게 살아야지

알록달록 병에다 강아지풀을 꽂아 본다
우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를 담아놓은 사진들, 그리고 그림들
남퍈의 로망, 나만의 서재 혹은 동굴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Kodak colorplus 200 / Kodak Ultramax 400 film

2017년 11월 ~ 2019년 4




지난 여름의 끝자락. 고생한 선풍기에게 감사 인사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는 빨랫감 대신 예쁜 등불
다들 자기 전 스탠드를 켜 놓고서 책 정도는 읽잖아요

Canon QL17 g3

Canon Lens 40mm 1:1.7

Fujicolor c200 film

2019년 8월



투명한 병에 들어 앉은 전구가 밤새 반짝반짝
주말 오후 나른한 햇살이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거에요
벽에 그림 두어 개 정도는 걸어줘야 사람 사는 집

Rollei XF35

Kodak gold 200 film

2019년 11월




 '우리집'이라는 건 까.


 서울로 올라 와 10년 넘게 혼자 살았다. 혼자 사는 20대 남자에게 집이라는 건 그저 잠이나 자고 짐이나 보관하는 었다. 식사는 으레 나가서 했으므로 집에서는 히 밥을 해 먹지도 않았다. 끽해야 밤 늦게 야식으로 라면이나 끓여 먹었. 월세나 보증금이 오르거나 취직에 성공하면 곧바로 방을 옮겨야 하니, 언제라도 이사가 가능하도록 집을 꾸며놓고 살지도 않았다. 잘 때 덮을 이불, 입을 옷, 공 서적 몇 권, 책상 하나와 그 위에 덩그러니 올려 둔 PC, 그나마 취미라고 할 수 있는 음악 감상을 위한 미니 오디오 하나가 집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우리집이라는 건 잠시 거쳐가는 '임시 거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장소였다.


 대학교 1학년 땐 기숙사에 살았다. 고향집과 가족 품을 떠나는 섭섭함과 잠들기 전 불현듯 찾아 오는 외로움으로 했던 것도 잠시, 인생 처음으로 맛보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지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거나 벽까지 바깥을 쏘다니고 휴게실에서 동기들과 야식을 배달시켜 먹곤 했으니 방에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1교시 수업 따위 제끼고서 늦잠을 자거나 혹은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누워있기만 하던 곳. 처음으로 생긴 나의 공간에 대한 기억은 이렇듯 보잘것없다. 사실 나만의 공간도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는 자주 보질 못해 데면데면했던 룸메이트도 같이 살고는 있었으니까. 그래도 1년이나 함께 했는데, 무슨 과였는지 이름이 뭐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숙사를 떠나 신림동 하숙집에 살고나서부터 이제 정말 나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다. 기숙사에 살 때보다는 조금은 나은 삶 펼쳐질까 기대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첫 번째 하숙집은 기숙사나 다름 없었다. 방 4개짜리 빌라 한 채, 큰 방엔 모르는 사람들이 살았고 중간 방엔 내가, 작은 방 둘엔 동기 K와 S가 각각 살았다. 내 방이 그나마 크다는 이유로 TV를 뒀기에 밤엔 다들 내 방에 모여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야식을 먹거나 역시나 지겹지도 않은 듯 술을 마셔댔다. 님들로 북적이는 사랑방 같은 꼴이었으니 나들기 편하게 중에는 아예 방문을 잠그지도 않고 다녔다. 어느 날엔 방으로 돌아왔더니 주인 없는 빈 방을 차지하고 있던 녀석들이 핀잔을 줬다. 여태 뭐하다가 이제 들어왔냐고. 이곳 역시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번째 하숙집은 월세를 아끼느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월 30만원이 채 안 되는 곳이니만큼 방이 작았다. 한 명이 간신히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고 두 명이 함께 자려면 이지 아주 친해야만 가능한 비좁은 방. 다행히도 창문이 있긴 했지만 도로에 바로 붙어있던지라 자려고 누우면 노란 가로등불 때문에 눈이 부셔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어서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가서 커튼 대용으로 쓸 브로마이드를 하나 얻어왔다. 좋아하지도 않던 sg워너비를 창문에다 붙여서 불빛을 가렸다. 여름에는 냄새 나는 쓰레기통을 좁은 방 안에 두기 괴로워서 쓰레기 봉지를 줄로 묶은 채 창 밖에 대롱대롱 매달아 뒀다. 그러면 적어도 방에서 냄새가 나진 않았다. 구들은 길을 걷다가 내 방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며 웃어댔다. 창문에 남자 세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종량제 쓰레기 봉투가 줄에 걸린 채 대롱거리는 집은 여기밖에 없을 거라면서. 인생 최초의 인테리어라는 게 고작 브로마이드와 쓰레기통이라니. 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다.


 취직에 성공하고 신림동을 떠나 사당동의 원룸으로 옮겼다. 이제는 조금은 사람 사는 집 은 집 대한 욕심이 생겼다. ㄱ자 형태의 커다란 작업용 책상, 소파 겸 침대, 턴테이블과 아이팟 도킹 스피커, 기네스 맥줏잔 따위를 사 들였다. 물건들이 잔뜩 들어왔지만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어색한 불협화음처럼 자리만 차지하며 쌓여갔다. 중요한 건 집 꾸미기용 소품들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해야 쓸고 닦는 에 무관심한 게 문제였다.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황량한 들판에서 굴러다니는 둥근 건초 덩어리처럼 생긴 먼지 뭉치가  안 여기저기 쌓였랬다. 집에 올 때마다 여자친구가 기겁을 하고 제발 청소 좀 하고 살라며 야단쳤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집이라는 공간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대충 잠만 자면 되지 뭘.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살면서부터 집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대출금 때문에 절반 넘도록 은행 소유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우리 집이 생겼다. 온전히 우리 손으로, 우리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와서 쓰는 물건들과 기억들로 가득 찬, 우리의 공간.  주인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벽에 못을 박아도 되고 이런저런 가구도 마음대로 사서 넣을 수 있다. 아내는 신이 나서 이케아와 소품점과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물건들을 주문했다. 처음에는 아내의 행동이 낯설었다. 왜 그리도 쓸데없이 예쁜 에 집착하는 건지. 집을 매일같이 쓸고 닦고, 옷걸이에 옷 하나  때도 방향과 길이를 맞춰야 하고, 바닥 무늬와 가구 색깔도 어울려야 하고, 장에 꽂힌 책들도 종류별 색깔별로 보기좋게 나란히여야 했다. 지나칠 정도로 인테리어에 신경쓰던 그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예쁜 집에서 예쁘게 꾸미고 살면 덩달아 우리 삶이 예뻐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보니 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의 부모님은 리가 처음 구매한 집 보시고선 그제야 마음을 놓으셨단다. 아들이 혼자 살 땐 이게 집인지 돼지우린지 구분이 안 돼서 늘 걱정이셨다고.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더니 이제 사람 사는 모양새로 사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싱글거리는 얼굴로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시던 부모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TV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나오는 나이 들고 철없는 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어무이 아부지, 저는 집이라는 공간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렇게 살았던 거지, 사람 구실 못하고 살지는 않았어요. 한국 남자들은 결혼을 해야지만 비로소 성인이 된다는 그런 차별적 생각을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며느리를 무슨 아들래미 보호자 역할로 들인 것도 아니구요. 여하튼 저도 이제 잘 해 놓고 살 거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집이라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집이 생긴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퇴근해 돌아오면 저녁 7시. 이제는 혼자 살 때와는 달리 하루 중의 절반이나, 꽤나 긴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됐다. 게다가 요즘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느라고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날도 있다. 삶을 아가는 데 있어 집이라는 공간이 점점 더 중요. 제서야 라는 공간을 자세히 바라보게 다. 그동안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사 오고, 벽에 못을 박고, 블라인드나 커튼을 설치하고, 가구를 조립하고, 전등을 다는 등,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집을 꾸미는 데 수동적으로 동참했었다.


 우리집을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 살펴 봤다.


햇볕은 오전에는 부엌 쪽에서, 오후에는 거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주말에 늦은 점심을 먹고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다 보면 오후 서너 시쯤 눈이 부셔서 아직 볕이 들지 않는 부엌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너 그러다 소 된다"며 게으름뱅이 짓 좀 그만 하라고 야단 아닌 야단을 친다.

하나 둘 모은 화분들의 잎새들은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르다. 같은 날, 같은 크기일 때 사 왔는데 어느 순간 서로 다른 모양으로 자라나 있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면 어떤 녀석은 잎에 물방울이 그대로 맺혀있고 다른 어떤 녀석은 도르륵 물방울이 흘러내리는데 왜 다른지는 모르겠다.

화장실 전등은 하얀색보다는 노란색 불일 때 마음이 편안하다. 수명이 한참 남은 멀쩡한 전구를 왜 갈아야 하나면서 궁시렁거렸는데 역시 아내 말을 들어서 틀린 게 없더라. 거울을 봤을 때 왠지 얼굴도 더 고와 보이고.

여름이라 활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면 하얀 커튼이 흩날리고, 시원한 찬물에 샤워를 하고서 아직 젖어있는 머리칼 역시 선풍기 앞에서 흩날리는 순간은 마치 파스텔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나 있잖아, 에어컨보다는 선풍기가 좋더라"며 아이처럼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아ㅡ 거리는 소리를 내 본다.

겨울에는 분명 보일러를 켜 놔서 집이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소파 위에 담요를 펼쳐 쏙 하고 들어가야 된다. 소라게가 소라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듯 어딘가로 들어가 있자면 왠지 더 따뜻한 느낌이다. 담요와 혼연일체로 돌돌 말려있는 나를 보고서 아내가 "너 완전 김밥 같다"며 놀려댄다.

그림이며 사진 액자들과 예쁜 전등불과 색깔이 고운 유리병 같은 소품들은 집 안 여기저기 놓여있다.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소풍날 보물찾기를 하는 것도 같다. 아내 몰래 비상금이라든지 비밀을 고백하는 쪽지를 써서 여기다가 숨겨두면 되겠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나중에 발견하게 되면 재밌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집 이곳저곳에는 하나같이 반짝거리는 장면들 가득했다. 그동안 나는 이런 것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었구나. 아름다운 순간의 행진 무리에서 나만 외로이 따로 떨어져 나와 있던 거였다. 우리집이라는 공간은 우리 삶의 흔적이 새겨진 매일의 일기장과도 같은 것이었는, 삶의 중요한 광경들을 그저 흘려 보내 버리고 있었다.


 우리만의 생각과 취향과 추억, 그러니까 삶의 모든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앞으로도 담아 갈 곳. 나에게도 이제 두 발을 딛고 면서 우리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생겼다. 그리고 기왕 살 거, 아내 말대로 예쁘게 꾸미고 살아야겠다. 그럼 예쁜 삶이 펼쳐질 수 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