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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Sep 03. 2021

여름의 초록색은 억울하다

비내리는 여름날이 좋다. 물론, 집 안에 있을 때 드는 생각이다.
여름이면 과일, 그 중에서도 복숭아. 그런데 제일은 복숭아냐 수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Kodak Proimage 100 film

2020년 7월




거실 창 밖의 감나무는 초록빛으로 흥건했다.

Canon QL17 g3

Canon 40mm 1:1.7 lens

Kodak proimage 100 film

2021년 7




 입추의 마법이라더니.


 지난여름, 매일 아침 거실 창을 열면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김 같은 열기가 후욱 집 안으로 들어왔. 더불어 달갑지 않은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귀를 찔러댔다. 이른 아침부터 오늘 하루 겪어야 할 더위 걱정에 아득해다. 걱정은 다른 걱정으로 덮겠다는 듯 다음 달  걱정을 하며 바삐 에어컨을 켰다. 그랬던 여름날 한참 지나, 입추 날 아침에는 얼음 두어 개 정도 넣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의 온도를 느꼈다. 분명 어제와는 다른 비율의 열기가 섞여 있는 대기였다. 처서를 지나고 나니 아주 차갑지는 않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시원함 비슷한 게 느껴진다. 사나웠던 여름 공기가 어느덧 유순해졌다. 이제 아침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 전기세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9월이 되었다. 부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벌써 여름이 다 갔다.


 여름 돌이켜 기억해 보면 머릿속에 잔상이 제법 또렷하게 남아있다. 겨울과는 다르다. 그 추운 계절에바깥이고 안이고 간에 온통 검고 희고 회색인 무채색 일변도라 릿속에 남아있는 장면들이 심상하고 흐릿하지만, 여름의 순간은 이와 달리 마다의 진한 원색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성기를 맞은 나무와 풀의 기 넘치는 초록빛, 흡사 블루 레모네이드 같은 바다의 푸른빛, 계절의 시작을 수놓았던 덩장미와 수박의 속살과 자두 먹음직스러운 빨간빛, 요맘때가 가장 맛있는 초당 옥수수와 황도 복숭아 속살과 참외의 노란빛, 두터운 양털 같은 적란운과 바닷가 백사장의 고운 하얀빛지. 개중에 둘째라는 평을 들으면 서운하기라도 한 양 서로 질세라 자신이 가진 색을 최대한으로 쳐댄다. 가지고 있는 색의 물감을  바른 수채화 같은 여름의 장면이다.


 그중에서도 지난여름에는 초록색이 유난했다. 길을 걸을 때도 차를 타고 달릴 때도 집 안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면, 마치 손가락에 봉숭아 물들이듯, 초록빛으로 눈을 물들이는 나무와 풀 사방에 가득했다. 직을 하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요즈음. 아이는 낮잠과 저녁잠을 합해 12시간여를 잠드니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 날엔 물경 12시간을 거실에서 함께 보낸다. 아침에 돋을볕이 들 때부터 시작해서 저녁 어둠이 사물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때까지. 해가 긴 여름이라 밤이 그리 일찍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 거실에 의 반 타의 반으로 초록색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초록색은 거실 너머 내다 보이는 감나무잎다. 봄에도 초록색이었지만 여름에는 어째 그 빛이 더 진해진 것 같다.


 여름 미풍에 살랑이는 초록잎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 아이가 보고 있던 그림책에 눈이 갔다. 이는 요즘 색을 구분하는 데 열중이라 <빨강 노랑 파랑 고양이> 그림책을 자주 꺼내 든다. 색색의 고양이들에 대해 읽어주다가 문득 새빨갛다, 샛노랗다, 새파랗다는 표현은 있는데 왜 새초록하다, 라는 말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진한 초록도 단어로 표현하고 싶은데.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빨간색 : 피나 익은 고추와 같이 밝고 짙은 붉은색.
노란색 : 병아리나 개나리꽃의 빛깔과 같이 매우 밝고 선명한 색.
파란색 : 맑은 가을 하늘과 같이 밝고 선명한 푸른색.
초록색 : 파랑과 노랑의 중간색. 또는 그런 색의 물감.
(※ 출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빨강, 노랑, 파랑 모두 저마다의 정의가 있는데 초록은 그저 '노랑과 파랑의 중간색'이라는 짤막한 설명로 끝이 났다. 소위 기본색이 아닌 합성색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보던 책에도 '노랑 고양이와 파랑 고양이가 딱 붙어 놀다 보니 초록색 나뭇잎이 되었네', 라는 페이지가 있다. 적잖이 놀랐다. 고유의 정의내림조차 받지 못하다니, 이건 초록색을 너무 하찮게 대하는 건 아닌가. 내가 다 억울하다. 실은 애초에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는 말은 있지만 초록하다는 말은 없으니 접두어 '새' 붙일 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난여름 한 철을 가깝게 지낸 벗으로서 편을 들어주고 싶다. 는 참으로 대단다고 말해주고 싶다. 보통날의 그냥 초록은 모르겠는데 '여름의' 초록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저렇게나 진한 빛깔을 자랑하는데 좀 알아주면 안 되나.


 어느 날엔 오래도록 비가 내렸다. 지리한 여름 장마에도 초록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 귤이나 오렌지 껍질을 벗길 때 시큼한 과육 방울이 알알이 톡톡 터져 콧속으로 들어올 때처럼, 나뭇잎들은 비를 맞을 때마다 더 짙어지는 초록색 내음을 물방울과 함께 튀겨냈다. 빗방울이 녹색 감잎을 톡톡 칠 때면, 왜일까, 청매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기억났다.


 어렸을 적, 매해 초여름마다 고성 외가댁의 산에 가서 매실을 땄다. 커다란 매실나무 밑에 빈틈없이 꼼꼼하게 비닐 포대자루를 깐다. 열매를 담아 갈 바구니도 빠뜨리지 않고 준비한다. 어른들이 나무 밑동을 으랏차 하고 걷어차면 초록색으로 익은 매실 알들이 바닥으로 투두두둑 떨어져 나린다. 슬레이트 지붕에 장마철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하다. 나와 동생과 사촌 형 누나들은 바닥에 떨어진 매실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는다. 열매에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새콤하고 달큼한 향이 퍼져 나온다. 맛있겠다 싶어 한 입 와삭 베어 물면 어찌나 시고 떫은지. 퉤퉷 하고 뱉으면 어른들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큰 소리로 웃으다. 가득 따 온 매실은 잘 씻어서 꼭지를 땄다. 멀끔해진 알맹이들을 유리병에 넣은 뒤 백설탕을 듬뿍 붓고 한참 후면 매실청 만들어졌다.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날, 새콤달콤한 매실청을 넣은 시원한 얼음물을 한 잔 들이켜면, 크으, 잠시나마 더위가 잊혔다.


 풀 냄새를 맡다 보 아직 학생이던 무렵의 여름밤도 생각났다. 밤늦게까지 시험 공부를 마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던 길. 림동 하숙촌으로 가는 밤 10시 셔틀버스는 이미 만석이라 포기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다. 도서관에서 학교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 옆에는 이름 모를 가로수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길 너머는 바로 산이었다. 여름이면 걸어가는 내내 짙은 풀 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그 사이로 풀벌레 우는 소리, 개구리 소리, 구구 구구 앞의 두 번은 낮게 뒤의 두 번은 높게 우는 산비둘기 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이 모든 장면과 냄새와 소리 한데 뭉쳐 아있다 소리치는 듯했다.  가운데에 있으니 그 생명력에 금세 전염이라도 됐는지 나 역시 살아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방금까지 책 안에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었지만 걷는 순간부터 눈과 코와 귀로 감각되는 자연의 세계의 즐거운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이면 부러 버스를 보내고 혼자 걷곤 했다.


 몇 해 전 여름휴가 때 보라카이에서 묵었던 리조트의 정원 내음도 빼놓을 수 없다. 지독한 게으름 탓에 계획이라고는 일절 세우지 않았다가 가 전날 겁지겁 69만 9,000원짜리 2박 3일 패키지여행을 하나 예약했던 여름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동남아의 풍은 인상적이었다. 시시각각 간의 흐름과 빛의 반사에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던 인상주의 화가들도 여기에서만큼은 흰색, 노란색 따위는 접어 두고 오로지 푸른색 물감 하나밖에 쓰질 못하겠군, 싶던 한없이 푸름에 가까운 푸른 바다였다. 그렇게 새파란 바다와 새하얀 모래와 진한 초록빛 열대수들. 이국의 낯선 모양의 초록빛 나무에서는 역시나 그동안 맡아본 적 없는 이국적인 향이 풍겨났다. 그곳의 주요 이동 수단인 퀴 세 개 달린 오토바이 트라이시클의 매캐한 기름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다가도 정원수의 초록 향을 맡으면 이내 두통이 말끔히 씻겨 나갔다. 고작 사흘간 맡았던 그 풀냄새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나뿐 아니라 아내 역시 여름이면 종종 그때 그 여행지의 냄새가 떠오른다고 한다.


 이처럼 감각은 기억을 환기시킨다. 비단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코로 맡는 냄새와 귀로 듣는 소리 역시 머릿속 어딘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장면들을 끄집어내 준다. 창 밖의 초록 보면서 그 예전 시골 큰집에 가서 까르르 웃으며 뛰놀던 꼬마 아이가 되었다가,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하루하루가 설렜던 대학생이 되었다가, 무늬 남방을 걸치고 이국의 청량한 다를 한가로이 거니는 여행객이 되기도 한다. 때 그 순간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양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아이를 보느라고, 전염병을 피하느라고 내내 집에만 갇혀 있지만 초록 덕분에 마음만이라도 기억 너머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삼 고마울 따름이다.


 리고 따져 보면 초록색은 그리 억울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황색을 보자.  친구는 자기만의 이름도 가지지 못하고서 대충 빨강과 노랑을 합쳐놓은 말로 이름 붙여져 있 가. 나보다 못한 남의 처지를 굽어 보건대 초록은 자기 고유의 이름이라도 가진 걸 감사해야 하나, 싶다. 대체 언제쯤이면 끝나나 싶던 여름이었는데 이렇게 금방 끝나나, 싶어 벌써부터 아쉬워진다. 사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이번 여름도 참으로 '새초록했다'.




아이의 그림책에 따르면 노랑 고양이와 파랑 고양이가 딱 붙어 놀다 보니 초록색 이파리가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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