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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May 22. 2020

입덧 같은 건 안 할 줄 알았지

임신한 아내의 입덧과 속 쓰림의 사이에서

 그동안 ‘입덧’에 대한 이미지는 이러했다.


 한눈에 봐도 화목해 보이는 가정. 하하호호 거리면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 중이다. 한 젓가락 채 입에도 넣기 전에 며느리가 갑자기 우욱, 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황급히 달려간다. 남아있던 가족들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혹시... 새아가, 좋은 소식 있는 거 아니야?”라며 들뜬 분위기에 젖어간다. 아니나다를까 여자는 임신한 게 맞았고, 그제부턴 시도 때도 없이 토악질을 한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도, 거리를 걷다 담배 연기를 맡았을 때, 밤늦게 퇴근한 옆지기의 몸에서 땀냄새가 풍겨올 때, 음식물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을 때도 매 순간마다. 임신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주변의 모든 냄새가 고역인 줄로만 알았다. 혹자가 말했던 것처럼 입덧이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밥을 먹는’ 느낌 같은 거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하지만 아내는 입덧이 심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말이지 의외의 순간이었다. 평소에 비위가 약해서 나에게도 잔소리가 잦았던 아내였으니까. 소파에 누워있다 방귀를 북 하고 뀌면 냄새가 독하지도 않은데도 코를 막으며 등짝을 때리고, 얼굴을 가까이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입냄새가 풍겨 난다며 얼굴을 찡그리고, 요리며 음료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냄새가 나면 죄다 버리는 데다가, 음식물 쓰레기 봉지는 역겨워서 도저히 들 수가 없다기에 늘상 내 담당이었다. 그렇게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니 당연히 입덧도 심해서 음식을 많이 가리게 될 줄로만 알았더랬다. 그래서 임신 초중기, 한창 영양분을 공급해야 할 때 제대로 먹질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쓸데없는 기우였다. 헛구역질은 고사하고 별로 가리지도 않고 밥만 잘 먹더라.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


 그러고 보니 나는 제법 운이 좋은 편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마어마하게 힘든 시련이나 고난을 겪은 적이 별로 없다. 양친 모두 건강하시고, 집안도 그럭저럭 화목했으며, 나도 동생도 소위 명문대를 나와서 밥벌이도 멀쩡히 하고 있고, 가족 중엔 급전을 꿔 달라는 전화를 할 만큼 형편 어려운 집이 있지도 않은 데다가,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짝을 만나서 결혼도 했고, 그리 힘들이지 않고서 마음먹은 대로 아이도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아내가 입덧도 겪지 않는 행운을 누린다. 어떻게 보면 참 재미없을 만큼 순탄한 삶이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걱정 없이 무난하게 살 수 있다는 것만큼 복받은 삶이 또 있을까.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있다. 사람에게 행운과 불행의 총량이라는 게 주어져 있다면, 나는 어쩌면 내가 가진 운을 죄다 써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앞으로는 나쁜 일의 지리한 행렬만이 나에게 남아있을까 봐 슬몃 두려워질 때가 있다.


 여하튼 아내는 입덧까지는 아니고 더욱 찾게 되는 음식이 생기긴 했다. 과일이 계속 당긴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특히 새콤달콤한 과일들이. 그래서 딸기, 귤, 천혜향, 레드향 같은 과일을 계속 사 먹었다. 평소에 신맛이라면 질색하면서 레모네이드 따위를 마시기도 싫어하던 아내였는데. 임신을 하면 정말 입맛이 바뀌긴 하나 보다.





 과일도 과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먹고 싶어 하는 건 떡볶이었다. 어느 책 제목처럼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더니, 임신하더라도 떡볶이는 먹고 싶어, 아니, 임신 전에도 좋아했지만 임신 후에는 더욱더 좋아하면서 떡볶이를 찾는 아내였다. 여자들은 왜 이리도 떡볶이에 환장하는 걸까. 아내와 결혼하기 전 30여 년 동안 혼자서 먹었던 떡볶이보다 결혼하고 나서 3년간 먹은 떡볶이 양이 더 많은 것 같다. 임신하고서는 집에서 떡볶이를 자주 해 먹는데,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새콤한 맛이 당긴다면서 그동안 안 넣던 케첩을 마구 들이붓는다는 거였다. 네 입맛이 이렇게나 극적으로 변할 줄 누가 알았으랴. 임신부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신맛에 끌리나 보다.





 그래서 서울의 떡볶이 맛집이라는 곳들도 찾아다녔다.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다는데 남편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줘야지. 직장동료 J 과장의 아내분은 임신했을 때 장어구이를 계속 찾아대서 지갑이 텅텅 비곤했다던데, 고작 떡볶이 따위 저렴한 음식을 좋아라 하는 아내에게 감사하고도 왠지 미안할 따름이다.


 마포의 유명한 떡볶이집을 찾아갔더니 주말 이른 오전이었음에도 줄이 무척 길었다. 가게도 좁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도 않았고. 기다리면서 내내 툴툴거렸다. 마침내 들어간 가게. 주문을 했다. 김밥, 오뎅국, 순대(순대 시킬 땐 순대하고 간만 주세요, 라고 외친다), 그리고 대망의 떡볶이. 양념이 아주 매우면서도 달짝지근했다. 두툼한 쌀떡도 쫄깃하고. 정말 다른 건더기는 아무것도 없이 매콤한 양념과 떡만 있는데 계속해서 손을 부르는 맛이었다. 떡볶이라기보단 떡꼬치 같기도 하고 별 거 없어 보이는데 참말로 이상하다. 긴 줄에 투덜거렸지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이사 온 곳 근처의 모래내 시장에서도 제법 이름난 떡볶이집이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들러봤다. 가게에 들어서니 사장 아주머니께서 계속해서 양념에다 떡을 휘휘 저어가며 볶고 계신다. 중간중간 물을 붓거나 양념장을 더 넣거나 떡을 덜어내고 들이붓고, 단순한 동작의 반복과 반복의 연속에서 장인의 향기가 풍겨났다. 금방 나온 떡볶이를 먹어보니 옛날 학교 앞 분식집의 컵떡볶이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맛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독특한 것이 콩나물국이 같이 나온다. 떡과 같이 먹으니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즐거움이 있었다. 메뉴판에는 라면도 있긴 한데 아주머니께선 떡볶이에만 집중하고 싶으신지 라면을 주문하면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라면 지금 주문하면 너무 오래 걸려요. 꼭 드셔야 해요?”라고. 이것이야말로 장인의 떡볶이 외길이군요. 먹어보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집이었다.


 종로를 산책하다가도 떡볶이 맛집을 찾아갔다. 실제로 예전에는 쌀집이었기에 쌀떡이 아주 괜찮다고 이름난 곳. 떡볶이와 떡꼬치와 튀김과 식혜까지 한 상 차림을 주문해서 배불리 먹었다. 소문대로 떡이 훌륭했다. 그동안 먹었던 밀떡과 다른 식감의 쌀떡이 쫀득쫀득하게 혀를 휘감아 온다. 그런데 지난주와 지지난주에 먹었던 떡볶이들이 너무 맛있어서 감흥이 다소 덜했다. 우리 입맛엔 맵고 달고 자극적인 게 딱인데 여긴 너무 건강한 맛의 느낌이다. 시고 맵고 짠 음식에 애달파하는 임신부의 입맛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새 자극의 역치가 너무 높아진 걸까.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며 인사하고 나왔다.


 이후로도 아내와 함께하는 떡볶이집 순례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예전에 살던 동네의 30년 된 즉석 떡볶이집에도 찾아가고, 배달 어플로 시켜서 받은 떡볶이들도 점수를 매기고, 밀키트 형태로 나온 떡볶이를 조리해 먹어 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떡볶이 천국'을 거닐던 날들이었다.





 떡볶이 외에도 매콤한 걸 계속해서 찾는 아내. 오징어볶음, 주꾸미 볶음, 명태조림, 아귀찜에, 심지어 집에서도 매운맛 카레와 칼칼한 부대찌개를 해 먹는다. 이러다가 우리들의 항문에서 붉은 깃발을 든 부대의 행진이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너 계속 이러다가 속 버려. 진짜 피똥 싼다. 임신부가 먹고 싶다는 걸 무조건 다 먹게 해 주면 안 되겠다는 걱정도 됐다. 아이 기를 때도 그렇고 임신부에게도 그렇고 욕구의 즉각적인 충족만이 능사는 아닐 텐데.





 말이 씨가 된다더니. 아내는 결국 배가 점점 불러올수록 입덧이 아니라 속 쓰림으로 고생했다. 새콤한 과일도 매콤한 음식도 이제는 겁이 나서 쉬이 손이 가지 않을 만큼. TV 드라마에서처럼 임신부는 만날 헛구역질이나 하는 입덧에만 시달리는 줄 알았지, 속이 쓰릴 줄 어찌 알았겠나. 임신을 겪어보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일이다. 좋은 남편들은 아내가 입덧에 시달릴 때 같이 입덧을 한다던데 나는 입덧도 속 쓰림도 못 느꼈으니 아는 것도 없고 좋은 남편도 아닌가 보다. 남자인 나로서는 아마도 평생 느껴 볼 수 없는 고통이자 변화를 아내 홀로 겪는다. 매일 밤 속이 쓰려서 잠 못 이루던 아내는 결국 병원 검진 때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약을 하나 처방받았다. 그 약을 먹으니 거짓말처럼 속이 하나도 쓰리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굳이 병원까지 와서 처방받은 약이 아니더라도 '개비스콘'이나 '겔포스' 같은 약을 사 먹어도 괜찮다고 한다. 그 정도는 임신부가 먹어도 특별히 문제 될 게 없다고. 그래도 혹여나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봐 걱정스레 이것저것 여쭤봤다. 


 “입덧은 안 하고 속만 쓰린데, 혹시 문제 있는 거 아닌가요?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태아가 자랄수록 엄마의 장기를 짓누르게 되니 위산이 올라오거나 불편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께서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해주셨다.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어찌나 걱정했는지. 아내가 임신한 지 3개월째, 몸의 조그마한 변화 하나하나에 웃고 울며 걱정하고 안심하며 민감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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