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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Firefly Mar 27. 2019

현재의 폭

황현산 교수는  <밤이 선생이다>의 앞머리에 실린 글 "과거도 착취당한다"에서 2009년 당시 대학생들이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라는 말"에 강하게 불만을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p.12)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시간적 범위가 커야한다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시간에 대응하여 공간적으로 공감하는 폭이 넓어져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독일 소설가 루이제 린저의 <완전한 기쁨>에 나오는 한 젊은 여성은 '세상 반대편 중국에서 굶어죽는 아이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한다'(문자 그대로 인용하지는 못함)고 말한다. 나에게는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 먼 나라에서 오늘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성숙한 정신임을 일러준다.


이 다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현재가 먼 과거까지 포섭한다면 이런 현재는 당연히 먼 미래까지도 아우를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가 두터운 사람은 미래 세대의 고통까지도 염려해야 할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역설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어쩌면 앞으로 올 세대의 고통을 근심하는 것과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다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착취"는 반드시 고통을 일으키는데 과거가 착취당할 때에는 누가 고통받는가?'하는 물음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대답은 "현재와 미래"이다.


더하여 당연히 이런 물음도 떠오른다. "과거가 착취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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