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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Firefly Feb 25. 2021

무거운 마지막 문장

사흘 전에 무심하게 펼쳤다가 좀 정신없이 빨려들어간 <달과 6펜스>를 오늘 오후 다 읽었다. 다시 읽을 책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나에게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그린 그림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흥미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롭다'는 더 정확히 말해 '심원하다', '깊이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방금 스트릭랜드가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한 인간형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보면 아주 그렇지는 않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오는 오를로프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나에게 스트릭랜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간략하게 그린 오를로프를 상세하게 그린 예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모옴이 이 소설을 읽었고 그가 스트릭랜드를 구상할 때 오를로프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도 든다. "모든 형벌과 고통을 경멸했고 지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를로프를 묘사하는 한 구절이다. 스트릭랜드도 이런 인간이 아닌가? (그리고 때로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 오를로프를 나는 좋아하지만 스트릭랜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스트릭랜드가 훨씬 더 자세하게 형상화되었기 때문일 수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체가 나에게 더 호소력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나는 화자가 상당히 마음에 든다. 이것 또한 이 소설을 읽은 적지 않은 보람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좋아할 수 있는 인물을 만나는 것이 나에게는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별로 읽은 것도 없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니 좀 이상하다. 그런데 밤 깊은 시간에 이런 잡문을 쓰다보면 이상한 문장도 쓰게 된다. 밤은 로맨스(허황된 이야기)의 시간이다!)


<달과 6펜스>의 화자와 다른 사람이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를 묘사하는 대목들은 나에게는 아주 귀한 문장으로 여겨진다. 예술 작품을 접하고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이 충격받고 깨어나는 양상을 전한다고 생각해서이다. 달리 말해, 이렇게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영혼의 감동을 이야기하는 감상문은 쉽게 만날 수 없다고 짐작한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런 감상문을 쓰는 것을 더 수월하게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모옴은 스트릭랜드의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우리에게 전혀 그림 자체로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림은 없고 비평만 있어도 되니 작가가 원하는 비평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서 칭송하는 작품들은 현실에서는 그릴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과 6펜스>의 마지막 문단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는 갑자기 굴(oyster) 얘기가 나온다. 그것도 평이하게 'oyster'라는 단어가 직접 쓰이지 않고 'Royal Natives'라는 특정한 굴이 언급된다. 오리무중에 빠졌다가 인터넷에서 어떤 학자가 쓴 해설문을 우연히 마주쳐 이를 읽고나서 겨우 이해를 했다. 이 글에 따르면 이 마지막 문장에서 소설 본문에서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의 의미도 암시된다고 한다. 참으로 무거운 마지막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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