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은 가슴 부수는
선혈鮮血의 빛깔,
붉은 동백꽃은
낭자히 흐드러지고
앙상한 나목裸木의
까칠한 침묵 속에서
호기豪氣로운 꿈은
붉게 돋아나고 있다
볕이 좋은 날이다. 두툼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가 몇 걸음 가보지도 못하고 햇살에게 옷을 내주고 말았다. 주로 다니는 수목원 산책로 입구에서부터 동백꽃이 붉게 웃으며 환영한다. 주변 나무들은 생기를 잃어 바짝 말라있거나 시들 거리는데 유독 동백나무는 짙은 초록을 뽐내며 붉은 꽃을 여기저기 피워내고 있다. 주변 배경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도드라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겨울의 적막함에 생기를 불어넣어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사실 겨울나무들이 바짝 말라 생기를 잃은 듯해도 모두 재가 되지 않고 본질만은 남겨둔다. TV에서 요리 전문가가 식재료인 함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봤는데 함초가 가을에 개화하여 붉은 자줏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겨울이 되면 앙상한 줄기만 남는다면서 뒤를 이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화려함은 소박함에서 비롯된다.
소박함을 채워야 화려 해지는 것이며 소박함이 있기에 화려함이 있다."
겨울나무들은 소박함의 본질을 지켜 나가기에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화려함의 절정을 누리는 것이다. 비쩍 말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느새 꽃눈, 잎눈들이 도톰히 살이 올랐다. 봄은 우리에게 단지 일순간의 화려한 개화를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겨울 지나 꽃을 피우기까지의 긴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준다. 다만 우리의 눈은 결과만을 보기에 찬란한 생의 매 순간의 과정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과연 봄만 그러하겠는가...
# 동백꽃 / 2021. 1. 27. pungg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