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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눕겠습니다

2부 봄 04

by 싱싱샘

기상 알람은 다섯 번이었다. 다섯 시부터 시작되는 아이폰 알람 사운드는 모두 ‘밤부엉이’. 이름은 밤부엉이지만 달밤에 후우우 후후후후우 하는 운치는커녕 요란하기 그지없다. 온전히 깨어 있다면 3초를 견디기 힘들고 비몽사몽이라도 귓가를 때리는 그 소리는 듣고 있기 몹시 괴롭다.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가며 매일 6시 38분 셔틀버스를 타야 했고 나의 다섯 시 알람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생의 나는 지각대장일 뻔했다. 아버지가 차로 실어 가까스로 교문에 내려주지 않았으면 지각을 몇 번이나 했을까. 독서실에서도 잠깐 엎드렸다 눈을 뜨면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있었는데 이에 관한 가설은 두 가지다. 나는 원래 잠이 많은 아이였을 것이다. 혹은 잠으로 도피하는 아이였을 것이다. 모두 그럴 듯하다. 세 번째 직장에서 아이들 교재를 만들었으므로 출간을 앞두고는 퇴근이 밤 한 시가 될 정도로 늦었다. 아침 아홉 시 출근은 거의 불가능했고 삼십 대 김 과장의 근태는 엉망이었다. 잠이 많다기보다 수면시간이 확보되지 않을 때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에 가까웠다. 나의 십대는 부모님의 사랑과 전쟁, 그 와중에 방치된 피해자 시기로 기억된다. 적극적인 삶의 의지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모자란 잠을 핑계로 까무룩 잠들곤 하는 아이, 잠은 손쉬운 도피였고 나는 그 도피처로 자주 향했다. 오로지 시간에만 복무하는 포로가 아니었을까. 삶에도 포로였고 잠에도 포로였다. 잠의 포로였기에 삶의 포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는 아이 나이로 두 번 산다. 딸의 중고등학교 6년을 나도 다시 살게 되었을 때 한두 시에 잠들고 다섯 시부터 울려대는 알람 소리를 듣는 건 그 어떤 괴로움을 능가했다. 중학교 출결은 고등학교 진학에, 고등학교 출결은 대학교 진학에 영향을 준다. 무단지각, 무단결석은 생각할 수 없었다. 질병지각, 질병결석으로 처리되려면 병원에 들러 진료확인서를 받아야 했다. 병결이 많아도 불이익이 있으니 떠지지 않는 눈으로 6년간 알람을 껐다. 대한민국 청소년기는 잔혹 동화다. 엄마는 잔혹 동화에 등장하는 시종쯤 될까.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면 아침 일곱 시 그때부터 미칠 듯이 잠이 밀려왔다. 침대가 부르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에서 원하는 건 오직 침대뿐인 상태. 눈을 떠보면 보통 열 시였다. 내 최소 수면시간은 여섯 시간인데 일이 있는 날은 자지 못하고 견뎠다. 견디면 견뎌졌는데 몸이 축나는 줄은 몰랐다.


오전에 자고 나도 머리가 맑지 않았다. 커피가 필요했다. 전화라도 오면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했는데 내가 내 잠 챙기는 것뿐인데 죄책감이 들었다. 매일 열 시까지 퍼자면 어쩌라는 거야, 내가 나에게 다정하지 못했을 때 동병상련인 친구가 ‘잠이라도 자야 버티지.’ 해준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이가 졸업한 뒤에도 한동안 알람을 지우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거의 집 앞에서 셔틀을 탔는데 고등학교는 정해진 승차 지점이 있었다. 차로는 3분이지만 1.8킬로 거리를 무거운 책가방 매고 걷는다는 건 혹독한 일이었다. 가방 무게에 몸이 꺾이면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일 차로 데려다주었다. 3년 동안. 데려다주고 와서는, 잠이라도 자야 버티지, 친구의 말을 웅얼거리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온몸으로 겪은 시간이어서였을까. 알람을 쉬이 없애지 못했다. 한동안 회색으로 꺼두기만 했다.


딸이 기숙학원에 들어간 지 석 달이 지났다. 이제 알람은 딱 두 번, 6시와 6시 15분에 울린다. 먼저 눈이 떠지기도 한다. 오전에 일하는 날은 수요일과 토요일밖에 없는데 그래도 여섯 시에는 일어나고 싶은 마음에 알람을 그대로 놔두었다. 이젠 밤 열두 시면 눕고 싶다. 아이 중고등학교 시기와 맞물려 이르게 통잠을 잃었다. 중간에 깨서 화장실 다녀와 다시 자거나 아예 잠이 깨는 날은 보리차 데워 마시고 책을 읽는다. 글을 쓴다. 오십 대가 되어 통잠도 영원히 안녕이다.


***


얘들아, 잠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해? 토요일 오전, 학교도 안 가는 날 애들이라고 쉬고 싶지 않을까. 나는 수업 전 잠시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행복하다. 내가 초등학생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나온 답은 핸드폰을 해요, 핸드폰 하는 거 말곤? 나의 질문에 한 녀석이 자기 뺨을 때려요, 대답했고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오전 수업 있는 날도 예전처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니니 나는 살 만하다. 가뜩이나 내려간 내 눈이 처지는 건 세월과 중력인 줄만 알았는데 수면 부족도 원인이었나. 한두 시간 더 잘 뿐인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산다.


뱃속에서 열 달, 육아 이십 년, 고단했던 시절이 알람 해제, 삭제와 함께 끝났다. 아이 방이 비었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 딸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를 하는데 물건이 별로 없으니 간단하다. 어느 날 대낮 안방 침대에 눕긴 어쩐지 어색해 딸 방 침대를 따뜻하게 덥혔다. 아무도 없는 한낮 책 한 권 들고 가만히 이불 속에 들어가 보았다.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몸을 눕히는 일이 행복하구나. 하루에 한 번은, 아니 눕고 싶을 땐 언제든 눕겠다. 나는 몰래 결심했다. 언제 눕고 싶을지 모르니까 한동안 침대를 늘 따뜻하게 해두었다. 수업 없는 오전에, 수업하고 돌아와서 화장도 지우지 않고 눕곤 했다. 책 읽다 휴대폰 하다 졸리면 ‘시리야, 삼십 분 알람 맞춰 줘!’ 훗일을 부탁하고 나를 놓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낮에 홀로 일어나 다시 커피를 내리고 수업을 가고… 그런데 자고 난 후의 나는 힘이 났다.


늦은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밥을 먹었다. 저녁이 아니라 야식이었다. 배가 고프면 배를 채우고 잠이 고프면 잠을 채우는, 나는 성능 떨어진 배터리 같은 몸을 간간이 충전한다. 이마저도 안 되는 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잠은 유효한 방법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싫어했다. 상투적이라서, 그리고 나는 이상주의자여서다. 눈에서 멀어져도 마음에서는 멀어지지 않는 무언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할 수 있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랬다. 딸이 기숙학원에 들어가고 나는 내 삶을 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잘하고 있으려니, 그 아이의 삶이려니, 이제 응원하는 자리로 물러나야 할 때려니. 결국 안 봐서 편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잤다. 언제든 누울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도 편해졌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선택할 자유는 사람의 마음자리를 넓게 만든다. 이리저리 마음이 돌아다닐 여유를 주니 편안했다. 편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의 실체다.


예전에 알았던 한 분이 일하는 시간 외엔 와식생활자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했다. 와식생활자라니 그 말이 재미있었다. 계속 누워 있는 건 조금 지겹지 않을까. 그렇게도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와식생활자까지는 되지 못할 것이다. 책 읽고 수업하는 시간 말고는 엉덩이가 정말 가볍다. 그래도 와식호지자好之者는 될까. 낙지자樂之者 반열에 들어 생활자까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잠의 참맛을 알았다. 몸 눕히는 기쁨을 알았다. 힘이 나니 하고 싶은 것이 자꾸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 힘은 의지를 내려놓고 가장 연약한 모드로 돌아가는 데 있었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고 일어나 행동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만, 좀 눕겠습니다. 아! 오늘은 수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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