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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미워하지 않는 (3)

4부 가을 02

by 싱싱샘

수술, 안 하셨네요.


그랬지. 수술은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 대학병원 마지막 진료일은 3월이었고 9월로 초음파를 잡아주었었다. 안내문은 진료 봉투 안에 곱게 넣어두고 잊었다. 그래도 근종이 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여성호르몬이 줄어드는데 커지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고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도 반이었다.


초음파를 본 뒤 진료실로 오라기에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초음파실’이라고 쓰인 곳에 갔다가 산부인과 초음파실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당일 초음파 50분 대기’ 진료 삼사십 분 전에 와서 검사하면 된다더니 밀리나, 그랬는데 의료파업으로 초음파를 보는 의사가 적으니 대기가 길어지는 것이었다. 구석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잇따라 사람들이 와서 묻는 소리가 들린다. 예약 시간이 지나도 진료는 볼 수 있다는 것, 초음파는 검사와 동시에 결과가 나오니 대기 시간만 지나면 진료는 거의 끝이라는 것, 검사 자체는 한 사람당 오 분 정도 걸린다는 것까지. 간호사는 비슷한 질문에 같은 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수술, 안 하셨네요. 잠시 뜸이 있었다. 근종이 커지고 있는데 왜 미루느냐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수술을 기다리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면 주사라도 맞고 가라고 했는데, 결정을 못 했다고 답했다. 파업 상황에서 주사를 맞고 가라는 건 시급하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내년 봄에 수술하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터지듯 나온 말이… 왜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시려고 하나요, 였다. ‘이 정도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텐데.’ 하는 탄식이 길게 따라붙는다. 나는 불편하지만 죽을 것 같진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즈음 죽을 것 같은 순간을 작게 한 번 겪었다. 그러니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의학적으로는 무의미한 시간이고 너무도 분명한 방법을 두고도 나는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스스로 어리석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때가 있는 것이 사람이지 않은가. 마음이란 특히 그렇지 않던가. 잠시 멈춰야 할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정리해야 했다. 아니, 그럴 시간은 충분히 있었는데 멈춰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삶을 선택하기 마련이다.’《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민음사 내게 안전은 곧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중간고사 두 주 전이었다. 진료실 문을 뒤로하며 간호사 선생님에게 조그맣게 내가 맞아야 하는 주사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앞쪽 수술상담실에서 수술 후 주의사항이 들려왔다. 커트 머리에 앉은 뒷모습이 앳돼 젊은 사람인가 눈길이 갔는데 나이 든 분이 나온다. 두 달은 무거운 것 드시면 안 되고요. 무슨 수술이었으려나. 초음파실은 들어가며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불러야 했는데 대기하는 세 명 모두 70년대생이었다. 수술은 곧 해야 할 것 같다. 삶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를 밀어왔으니 이번에도 믿어볼 만한지 모르겠지만 한 발 떼기에 주저하는 중이다. 내 모든 글은 주저함의 기록이다. 나아감은 오랜 주저함 끝에야 가능했다.


다음 검사 전까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MRI와 초음파 영상, 의무기록 사본을 복사했다. 근종은 계속 자란다고 했다. 그새 1.5센티가 더 자랐다. 그 정도야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 표정이 좋지 않다. 철딱서니 없는 나는 안내문에 적힌 ‘부인과 초음파(정밀, 도플러)’를 읽고 ‘정밀’에 쫄았다가 ‘도플러’는 뭘까 궁금해졌다. 병원 문을 나서니 해는 질 채비를 하고 낮 더위가 가시지 않은 바람이 살짝 불었다. 오랜만에 든 작은 가방엔 병원 서류 봉투가 들어가지 않았다. 옆에 끼고 수업에 늦지 않으려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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