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임솔아 작가를 알게 된 건 십 대 소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주는 최선의 삶이라는 장편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시집을 읽고 참 좋은 작가다 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단편집을 만나게 되었네요. 장편소설과는 다르게 단편 소설은 섬세하고 세밀한 감정들을 담고 있어서 더욱 좋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소설은 그만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뭔가 시의적절한 소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세 편의 리뷰를 적어보았습니다.
그만두는 사람들
나는 학창 시절 함께, 과제를 했지만, 큰 인연은 없었던, 혜리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혜리는 유학을 위해 스웨덴으로 떠났고, 한국인들과 섞이고 싶지 않아.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러다 교수로부터 인종차별 언행을 듣게 되고, 분개하여 외국 친구들에게 털어놓지만, 그 후로 외국 친구들은 그녀를 멀리하게 되죠.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고립감이 혜리의 마음을 채웠겠죠.
나는 문단의 불합리함을 고발하고 문인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와 고립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혜리와 나는 멀리 떨어져 있고, 전혀 다른 삶을 살지만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어디로 살더라도 불합리함과 불의는 생기고 그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조직으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인지도 모릅니다.
사건을 겪고 난 나는 작은 어촌마을 콘도에 머물게 됩니다. 4박 5일간의 여행을 계획했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고립된 생활에 만족을 합니다. 이 소설 속에서의 고립이란 홀로 안온한 생활을 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 생각됐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택한 고립 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많은 존재들은 자발적 고립을 택합니다.(사비나, 노루섬의 노루, 혜리, 나)
하지만 사람은 극도의 고립 속에서는 살 수 없죠. 나는 멀리 떨어진 혜리와 적절한 거리를 둔 소통을 시도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그 거리감 덕분에 소통에 성공합니다. 서로의 일들에 간섭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봐 주기 만을 하면서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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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촌 마을에서 두 동물들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저는 이 동물들이 나의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마주하게 되는 동물은 밤이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피해 바다를 헤엄쳐 섬으로 건너가는 노루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안전한 곳을 찾는 노루를 보며 그만 나는 그 모습이 경이롭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노루를 통해서 외부세계와 고립을 스스로 택한 내가 어촌마을을 찾게 되는 과정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짧은 끈에 묶인 채 살고 있는 강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선의와 호의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런 모습 속에서 나는 자신 안에 숨겨진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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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상황에 처해 조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의 선택은 결국 그만두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그런 불합리한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시도합니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고립되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거리를 둔 존재와 소통을 시도하고 그 소통은 성공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무척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비판이 가능하도록 열려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좌절하는 구성원을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너무도 먼 일인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실의에 빠진 인물들을 치유하고 절망에서 건져 올린 소설의 시도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파리 돌보기
평생을 일 해왔음에도 경력단절 여성으로 취급을 받았던 원영은 연구소에서 초파리를 기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폐기해야 할 초파리를 집으로 가져오면서 아프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원인은 어느 병원에서도 알 수 없었습니다. 느긋한 원영과 다르게 딸인 지유는 자꾸만 병의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원영은 소설가인 딸 지유가 자신을 소재로 행복한 이야기를 써주길 바랍니다. 그동안 행복한 이야기는 써오지 못했던 지유는 난감함을 느낍니다. 소설가인 지유는 동료 소설가 치온을 만나서 서로가 가끔씩 기억을 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로열젤리를 먹고 난 후 원영은 놀랍게도 병에서 회복하게 됩니다. 지유는 결국 소설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 속 현실과 소설 속 소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 것 같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온 여인의 노년의 삶이 힘들고 아픈 결말이라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피엔딩은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작은 곤충인 초파리를 귀여워하고 아끼게 되는 원영이라는 인물이 좀 독특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불행이 일어날 때 우리는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 하지만, 사실 그 원인이라는 것이 해결을 해줄 수 없는 문제가 대부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로열젤리 같은 우연이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치온과 지유의 기억의 망각이 원영의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결점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 부분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좀 난해하게 느껴졌어요.
중요한 요소
영화감독 소민과 소설가 치온의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소설가 치온은 초파리 돌보기의 그 치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은 유기견을 키우고 있습니다. 소민의 강아지 라니는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기억 때문인지. 사람을 잘 따라 사랑스럽지만 과도한 애착을 보이는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는 강아지이고, 사료를 잘 먹지 않습니다. 율무는 아기 강아지이고 자기 똥을 먹는 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고쳐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고쳐지지는 않습니다.
버려진 강아지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라니의 사람을 따르는 명랑함이 자신이 버려질 수 있다는 아픔에서 온 것이란 사실이 더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율무는 어린 시절 좁은 곳에 갇혀 지냈던 트라우마로 자신의 똥을 먹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인간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란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조건 없이 인간에게 호의적인 아이들이 행복하게 지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소설은 특별한 갈등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담담하게 강아지와 그들을 키우는 이들의 모습과 만남을 담습니다. 별다른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아픔이 어떤 계기로 치유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묘한 울림을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유기견들은 평생 상처를 가진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이들에게는 그만큼 섬세하게 상처를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